“운동부 학폭 50년 대물림… 합숙문화 없애 폭력사슬 끊어야”[인사이드&인사이트]

황규인 기자 , 강동웅 기자 입력 2021-02-24 03:00수정 2021-02-24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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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계 합숙훈련 개선 목소리
서울 관악구 신림중의 축구부 학생들이 23일 오후 훈련을 마친 뒤 과거 기숙사로 활용했던 휴식 공간에서 쉬고 있다. 신림중은 2019년 서울시교육청 방침에 따라 16년 넘게 운영해 오던 기숙사를 폐지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프로배구를 시작으로 스포츠계에 ‘학교 폭력(학폭)’ 폭로 사태가 일파만파 번지면서 합숙소가 학폭의 온상이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합숙 훈련은 한국을 스포츠 강국으로 이끈 요람 역할도 했지만 관리 소홀로 지도자, 선후배 간 폭력 등 부작용이 끊이지 않았다. 합숙 폐지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폐쇄적인 공간에서 벗어난 열린 합숙소로의 변신도 시도되고 있다.

“선수가 시합 전에 합숙하는 것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그들이 평상(平常)에 지불하는 식비는 내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1923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박석윤(1898∼1950)이 중앙체육단 주장 자격으로 기고한 ‘선수론(選手論)’ 가운데 일부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도 적어도 대회 전에는 운동선수가 합숙을 하는 게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북한에서 사형을 당한 박석윤이지만 한국 야구사를 논할 때는 그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일본 동경제국대 출신인 박석윤은 그해(1923년) 휘문고보(현 휘문고) 야구부 감독을 맡아 이 학교를 전일본중등야구선수권대회, 현재는 흔히 고시엔(甲子園)이라고 부르는 일본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본선으로 이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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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대회 본선은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있는 나루오(鳴尾) 구장에서 열렸다. 만선(滿鮮·만주와 조선) 대표로 이 대회 본선에 참가한 휘문고보뿐 아니라 일본 각지 대표로 참가한 학교 역시 이 구장 인근에서 합숙을 해야 했다. 현재도 이 대회에 참가하는 학교는 고시엔구장 인근에 숙소를 잡고 대회를 치른다. 예나 지금이나 대회가 있는 한 선수에게 합숙은 숙명인 셈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렇게 대회 참가 차 합숙을 하는 일 이외에 ‘합숙 연습’이라는 개념 역시 존재했다. 1936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생(1912∼2002) 등이 일본 가마쿠라(鎌倉)에서 베를린 올림픽 대비 합숙 훈련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했다. 단, 이때 합숙 훈련은 현재로 치면 ‘전지 훈련’에 가까워 ‘합숙 훈련’과는 개념이 다르다.

요컨대 한국 스포츠에서 존재하는 합숙 훈련이라는 개념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현재 일본에서는 학기 중에 학교 운동부가 합숙 훈련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방학 중에 단기간 합숙 훈련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한국 학교의 합숙 훈련 관행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 관행이 된 합숙


2011년 체육과학연구원(현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에서 펴낸 ‘학교운동부 합숙훈련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에 따르면 학교 운동부에 합숙 훈련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대학 입시에 체육특기자 제도가 도입된 1972년부터다. 당시에는 ‘전국대회 4강’처럼 학교 성적을 바탕으로 선수에게 체육특기자 자격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경기력을 끌어올린다는 이유로 상시 합숙 훈련이 관행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각급 전국대회 역시 합숙 훈련을 학교 운동부 관행으로 만든 이유다. 고교 운동부는 각 시도 대표 자격으로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운동부 역시 2019년 대회 폐지 전까지는 전국소년체육대회에 각 시도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에 따라 각 지역 ‘거점 도시’에 있는 각 종목 명문 학교에만 운동부가 있는 경우가 많아 학생 선수는 운동부를 찾아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로 진학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근 학교 폭력 사태를 촉발시킨 여중 배구부는 서울에 세 팀, 경기와 충북에 각 두 팀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도에는 딱 한 팀씩 총 20개 팀밖에 없다. 게다가 지방에 사는 학부모와 학생 모두 집에서 가까운 학교보다 성적이 잘 나오는 수도권 학교를 선호한다. 거꾸로 기량이 떨어지는 수도권 학생은 지방으로 내려가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스포츠혁신위원회 역시 2019년 학교 운동부 합숙소 전면 폐지를 권고하면서도 원거리에서 통학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기숙사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탓에 이름만 ‘기숙사’로 바꾼 채 ‘합숙소’를 유지하는 학교가 적지 않다.

합숙 생활은 ‘생활’을 공유한다. 이로 인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선수 간 ‘서열화’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19년 12월 발표한 ‘학생선수 인권침해 실태 전수조사’에 따르면 ‘원하지 않는 각종 심부름, 빨래, 청소를 대신 한 적이 있다’고 답한 학생들이 지목한 가해자 가운데 선배 선수(42.6%)와 또래 선수(11.6%)가 절반 이상(54.2%)을 차지했다.

합숙 경험이 있으면 선수 사이에 폭력을 경험한 비율도 올라간다. 고등학교의 경우 합숙을 하지 않을 때는 신체 폭력 가해자 가운데 31.2%가 선배 선수였지만 합숙을 하면 41.7%로 10.5%포인트 늘어난다. 고교 남자 운동부는 아예 감독(9.9%)이나 코치(32%)보다 선배 운동선수(44.9%)가 피해자를 때린 경우가 더 많았다.

한 배구 선수 출신은 “학교 운동부에서는 실력 좋은 선수가 ‘왕’이다. 만약 이 선수가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하면 지도자도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쓴 책인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능력주의는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고 강조했던 문제점이 한국 학교 운동부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교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합숙이 이뤄지고 있는 초중고 운동부에 강력한 통제 시스템을 도입해 폭력 등 전반적인 훈육의 결핍을 막는 것”이라면서도 “폭력적 관행이 오래도록 이어져온 학교의 경우에는 합숙 문화 자체를 철폐해 폭력의 굴레를 끊어내는 게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 합숙소 폐지 vs 유지


실제로 합숙 훈련 철폐 효과를 노리는 학교도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2019년부터 중학교 운동부의 기숙사 운영을 전면 금지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중 축구부도 16년 넘게 이어온 기숙사를 폐지했다. 옛 기숙사 건물은 학생들의 휴식 공간 겸 라커룸으로 바뀌었다. 휴식 공간에서는 같은 학년끼리 같은 방을 쓰도록 정했다. 동선을 구분해 선후배 간 접촉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이다. 이현우 신림중 축구부 감독은 “훈련이 끝나면 바로 귀가시키기 때문에 학교 폭력이 발생할 위험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23일 오후 훈련에 참여한 신림중 축구부 학생들 14명의 표정은 매우 밝아보였다. 경기 부천시에서 통학 중인 신림중 3학년 김서진 군(15)은 “기숙사에 살 때는 휴대전화도 못 쓰게 하고 빨래 등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제는 통학 거리가 멀어져서 힘든 점은 있지만 즐겁고 재미있게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합숙소 폐지에 따라 훈련 효과가 줄어드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다는 게 이 감독의 설명이다. 이 감독은 기숙사 운영이 폐지되면서 훈련 후 단체 전략 회의나 선수 개인 상담 등이 어렵게 되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훈련이 끝나면 전자파일 형식으로 전략 지도 문서를 만들어 선수들에게 전달하고, 훈련이 없는 날 회의가 필요하면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을 활용하기도 했다.

많은 스포츠 전문가들은 지역 연고 유소년 시스템을 활용해 프로 및 실업팀에서 직접 학교 운동부를 관리하도록 하면 학폭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문제를 일으킬 경우 상급 학교 운동부 진학이나 성인 무대 진출이 불가능해 운동을 관둬야 한다는 경각심을 심어줘 학폭을 예방하는 방식이다. 한 프로팀의 관리를 받는 수도권 A고 축구부가 창설 이후 13년 동안 합숙 훈련을 진행해 오면서도 학교 폭력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던 비결 역시 여기 숨어 있다. 이 학교는 매년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학부모 공개 설명회를 열어 선수 인성과 관련된 폭력 등 문제가 발생할 때 학교에서 계속 운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지한다. 내부적으로는 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반드시 경찰 조사를 거쳐 진상을 파악하는 매뉴얼도 마련했다. 그렇다고 ‘말’에만 의존하는 건 아니다. A고는 38명에 달하는 선수들을 기숙사 3개 층 20여 개 방에 나눠 관리한다. 각 방은 2인 1실로 같은 학년끼리 사용하도록 하고, 각 층마다 감독과 코치진이 돌아가며 상주한다. ‘훈육의 결핍’은 이 학교에선 남의 나라 얘기다.

황규인 kini@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강동웅 기자
#운동부#학폭#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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