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의 고집 “어제보다 나은 샷”[오늘과 내일/김종석]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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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도 스윙-클럽 바꾸는 고진영
‘낡은 나’를 넘어서야 꿈도 이뤄진다

김종석 스포츠부장
김종석 스포츠부장
초등학교 3학년 진영의 꿈은 분명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16년 전 메모에는 또박또박 써내려간 종이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저는 커서 골프 선수가 꿈이고요. 열심히 해서 우리나라를 빛내고 싶습니다.’

소녀는 열 살 때 골프를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맞벌이를 하며 외동딸의 운동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했다. 스무 살에 고 프로가 됐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 제출한 자기소개서는 다른 선수보다 두 배 넘는 원고지 2장 분량. 내용은 이렇다. ‘어렸을 때부터 골프 선수에 대한 큰 꿈을 품고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 LPGA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해 국위 선양을 하고 싶다. 최종 목적지는 미국 명예의 전당이다.’

‘우리나라를 빛내고’, ‘국위 선양을 하고 싶다’던 고진영(26)은 지난해 말까지 75주 연속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굳게 지키며 꿈을 이뤘다. 201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뛰어들어 신인상을 거머쥔 뒤 이듬해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첫 전 관왕에 올랐다.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시즌 막판 4개 대회만 출전하고도 2년 연속 상금왕을 차지했다. 과거 KLPGA투어에 데뷔하며 “다 해 먹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가 악성 댓글에 시달렸던 고진영이지만 요즘은 골프 여왕이라는 찬사가 쏟아진다.

그의 성공 비결은 뭘까. 일찍부터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졌고, 강한 정신력과 성실한 태도는 기본. 중학생 때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주말을 맞아 선배들이 바닷가에 가자고 하자 “우리가 놀러온 건 아니지 않느냐”며 연습장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할 말은 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고 선배’.

고진영은 지난해 말 오프라 윈프리의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이란 책을 지인에게 선물받았다. ‘나에게 더는 이롭지 않은 낡은 습관이나 성향은 없애 버리자.’ 이 책의 한 구절이다. 고진영도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를 꾀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더 높은 곳을 향했다.

끊임없는 스윙 교정이 대표적 사례. 한창 잘나갈 때도 변신을 거듭했다. 지난해 5월엔 새 코치를 만나 스윙을 가다듬었다. “어제보다 나은 샷을 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코로나19로 국내에 머무른 6개월 동안 스윙 궤도와 체중 이동을 개선해 비거리를 늘렸다.

클럽에서도 아이언만 특정 회사와 계약했을 뿐 우드, 웨지, 퍼터, 공 등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최적 조합을 찾고 있다. 5개 브랜드가 섞여 있는 고진영의 캐디백은 골프숍 같다. 앰프, 스피커, 턴테이블을 잘 구성해야 최고 음질을 연출하는 명품 오디오가 나오듯. “심리나 몸 상태뿐 아니라 기술적 측면에서 가장 적합한 클럽을 찾으려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운동뿐 아니라 영어에 일찍부터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LPGA투어를 염두에 뒀기 때문. 일요일 대회를 마치고 난 뒤 월요일이면 영어 교사를 불러 과외를 받았다. KLPGA투어에서는 드물게 해외 경험이 풍부한 호주 출신을 전담 캐디로 고용했다. 미국 진출 후 잠들기 전에 외국 선수의 인터뷰 동영상을 보면서 표현을 익혔다. 말이 통하지 않고서는 적응하기 어려운 낯선 타향에서 입과 귀가 열리면서 자신감은 더 커졌다.

새해가 막 밝았다. 코로나19의 끝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막막하다. 그래도 누구나 소망과 다짐을 떠올리는 시기다. 고진영은 여름 도쿄 올림픽을 정조준하고 있다. 시상대 꼭대기에 오를 가슴 벅찬 상상을 하며 뭔가를 또 바꿀 것 같다. ‘미래는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부인으로 꼽히는 엘리너 루스벨트가 남긴 명언이다. 꿈을 이루려면 ‘낡은 나’부터 깨뜨려야 한다. 달라질 준비 되셨나요.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고진영#골프#세계랭킹1위#스윙교정#엘리너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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