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21/중편소설 당선작〈줄거리〉]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

동아일보 입력 2021-01-01 03:00수정 2021-01-01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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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보기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B 제작팀 홍 PD의 제안으로 나는 촬영 감독 K와 코끼리가 있다는 남도의 섬으로 취재하러 간다. 섬으로 가는 배 위에서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밤바다를 보며 나는 실재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한다. 남도의 작은 섬에 코끼리가 산다는 것에 의문이 생겼지만 홍 선배는 여러 시사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굵직한 상들을 휩쓴 데다 일처리에는 정확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준 기회를 호기라 여기고 프로그램의 절차를 생략한 채 그 섬으로 간다. 홍은 몇 년 전 교육방송에 있을 때 ‘조선시대 코끼리 살인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내보낸 적이 있었다. 역사적 의미 부여보다 흥미를 겨냥한 교육용 프로였다. 작년에 남도의 철새를 취재하다 이 섬에 들르게 되었고 사라진 코끼리의 행방을 찾아 추적해 보고 싶다는 기획 의도를 나에게 덧붙여 말하며 홍은 조선시대 코끼리를 찾으라는 특명을 내린 거였다.

방송에 더 많은 자본이 들어오면서 PD들의 이동이 잦자 언제 퇴물이 될지 모르는 불안과 긴장의 일상이었다. 이런 내 속내를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 홍이었다. 나에게는 코끼리를 찾으라고 해놓고는 홍은 몇 달째 잠적해 방송국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맡고 있는 다큐멘터리 프로는 5년째 안정된 시청률을 보였으나 나는 다큐의 본질보다 어떻게 하면 시청률을 끌어올릴까 하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밤늦게 섬에 도착한 나는 섬 주변을 돌아보다가 무게감이 느껴지는 코끼리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이 섬에는 코끼리가 없다는 민박집 주인의 말에도 나는 코끼리가 있다고 확신한다. 꿈에서도 내가 찍고 싶었던 코끼리 꿈을 꾸는데 코끼리도 사람들도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침 일찍 마을회관에서 나는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세 할머니를 만나 인터뷰한다. 그들은 한사코 코끼리가 있다고는 말하나 보여 달라고 하자 외지인에게 부정 탄다며 코끼리는 보여주지 않는다. 할머니들은 코끼리 때문에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이 무병장수하고 화목하며 해일과 사고가 없었다며 이구동성으로 코끼리 찬사를 쏟아놓는다. 세 노인이 코끼리가 있다고 가리킨 섬의 산 중턱은 꿈에서 본 장소와 비슷해 나는 기시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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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와 비자나무로 숲이 우거진 산은 원시림을 방불케 했다. 코끼리와 사는 정도길 어른, 홍이 만나보라고 한 그를 만나기 위해 산 중턱까지 찾아 올라갔으나 기대했던 코끼리가 보이지 않자 나는 실망한다. 초라한 움막에서 살아 있는 코끼리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챈 나와 K는 상자에서 나온 목각 코끼리를 보고 애써 김빠진 마음을 감춘다. 정 노인은 코끼리 목상의 그을림 작업을 보여주었으나 K와 나는 그 과정을 촬영하면서도 살아 있는 코끼리가 아니라서 낚였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마을의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코끼리들은 정 노인이 만든 게 아니고 정 노인의 선조들이 준 목상이었다. 나는 목상마다 다른 코끼리의 형상을 발견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코끼리 목상은 살아 있는 목상으로, 살아 있는 코끼리로, 정령 같은 존재였다. 정 노인은 1년에 한 개의 코끼리 목상을 만드는데 그마저도 이제는 손목과 손가락이 아파 만들지 못하게 되었다며 그을림 작업의 코끼리가 마지막 코끼리라고 말한다.

나는 홍이 어쩌자고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맡겨 난감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코끼리를 찾아서 이 섬에 왔지만 코끼리는커녕 비자나무로 만든 한 개의 목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여러 다큐멘터리 프로를 맡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내장산에 홀로 사는 할머니’ 건도 그 프로를 시청한 자녀들의 감응을 자극해 높은 시청률을 보였고, ‘화장 권하는 사회’도 적시와 시의성으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기에 나는 홍 선배의 감각을 믿어보기로 한다. 조 PD가 ‘그 섬에 코끼리가 있다’를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로 타이틀을 정하자 내 고민은 점점 깊어만 간다.

정 노인은 움막에서 뭔가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세종대왕의 교지를 꺼내 보여주지만 내 눈에 보이는 실상은 80%가 넘게 타버린 너절한 두루마리로 물적 증거가 약한 교지였다. 나는 이게 타지 않았다면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을 건데 그렇지 못함을 못내 안타까워한다. 더불어 정 노인의 선조 정 주부가 남긴 코끼리 관찰일지에는 코끼리가 이 섬에 정착할 때부터 코끼리들이 일본군에게 죽기까지의 사연이 짧게 기록되어 있었다. 눈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보다는 정 노인의 집안이 몇백 년간 코끼리와 맺은 사연만 무성했다. 코끼리가 있다는 섬에 코끼리는 없고, 하찮은 증거들과 노인들의 인터뷰로 촬영을 마쳤지만 이 프로를 방송하려면 코끼리를 CG로 편집해야 할지 나는 고심한다.

내가 안정과 보장된 수입을 추구하고 있을 때 M은 이국의 어느 산속에서 7년간 한 다큐멘터리를 위해 매달렸다. 100분의 엔딩 컷이 올라갈 때 현상 너머의 세계를 재현한 M의 다큐멘터리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 내면의 흐느적거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노인들의 인터뷰 내용과 그나마 취재한 내용을 근거로 뭔가를 만들려고 했으나 서울로 가기 하루 전 촬영한 테이프가 담긴 배낭을 잃어버린다. 메인 PD인 조 PD는 취재한 내용들을 메일로 보내라고 하고 며칠을 소진했음에도 조 PD에게 문책당할 생각을 하자 나는 앞이 캄캄해진다.

테이프를 찾으러 배를 타고 민박집에 머문 낚시꾼들을 만났으나 거기에도 촬영 배낭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찍자는 K의 권유로 마을회관으로 돌아갔지만 노인들은 큰 섬의 잔칫집으로 가버렸고, 다랑이밭에서 일하는 할머니의 인터뷰도 시간만 낭비했을 뿐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다.

마지막 희망으로 섬 지리에 밝은 정 노인을 만나 테이프 행방을 확인하기로 한다. 촬영 장비를 챙겨 거듭 산으로 오르는 K를 보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 컷도 찍지 않고 온몸의 감각으로 자연을 느낀 K가 보여준 미더움을 떠올리며 나는 힘을 낸다.

움막에 도착한 우리에게 정 노인은 홍 선배가 다녀갔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홍의 행색을 정 노인에게 묻자 콩대와 농기구들을 챙겨 “코끼리”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갔다는 말을 듣자 배낭을 가져간 사람이 홍 선배일 거라고 짐작한 나는 홍을 찾아 나선다. 작은 섬이라도 홍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순간 떠오른 직감에 코끼리가 떨어져 죽은 해안 절벽에서 그를 만난다.

홍 선배의 몰골은 광야에서 헤매고 다닌 꼴로 형편없었다. 그동안 우리를 쭉 지켜보았다며 우리가 찍은 촬영 테이프를 바닷가에 던져버리려 하나 끝내 홍은 던져버리지 못한다. 홍은 사이비 종교집단 특종을 터뜨림으로써 살해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아내가 지금까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가족의 피해 실상을 털어놓는다. 게다가 얼마 전 아프리카에서 취재하다가 죽은 친구 송 PD로 인해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송 PD는 외주업체 소속으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독립 다큐를 찍는,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다큐멘터리 PD였다. 나에게 안정적인 다큐만 찍지 말고 이번 취재로 변화를 시도하라고 홍은 당부하지만 어째 홍 자신에게 당부하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정 노인의 가문이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걸었던 사연을 취재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홍과 꼬리 섬의 코끼리 무덤을 촬영하기로 한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동남아 야욕으로 코끼리들은 섬사람들을 구하려다 모조리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신기하게도 25년마다 짧은 순간에 이 꼬리 섬은 뭍처럼 드러나 하늘로 올라가듯 솟는다는 홍의 말이 나에게 지나친 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순식간에 섬은 물이 빠져 밑동을 드러내 보이고 K는 그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이 빠져 작은 섬과 연결된 꼬리 섬의 밑동에는 동물의 등뼈 같은 코끼리의 뼈들이 쌓여 있었다. 코끼리의 울음소리는 바닷물이 빠지자 들리더니 바닷물이 차오르자 울음소리가 뚝 끊긴다.

정 노인과 홍 선배는 코끼리 무덤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우리는 절벽 아래 동굴에서 정 노인이 그린 코끼리 벽화들을 보게 되고 그의 불행한 가족사도 알게 된다. 독자인 아들을 베트남전쟁으로 잃게 되자 그 충격의 여파로 아내마저 병을 앓다 죽었다는 거였다. 오랜 시간을 함구하다 정 노인이 홍에게 코끼리를 알린 것은 이 섬에 아이들이 돌아올 것을 바란 염원이었는지도 몰랐다. 선조 때부터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 그 집안은 희생한 것이었다. 홍은 가지고 온 농기구로 갯벌의 진흙과 콩 줄기를 섞어 무수한 세월에 바랜 벽화의 그림을 현재의 그림으로 재현하는데 코끼리 옆에 정 노인과 홍, 나와 K가 서 있는데 내 눈에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여겨진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조 PD와 방영을 두고 갈등을 겪는다. 제일 핫한 코끼리 무덤 촬영한 것을 내놓지 않자 조 PD는 코끼리가 살고 있다는 섬에 가서 물적 증거도 없이 방송을 내보내려 한다며 방영 불가를 외친다. 조 PD와 나는 타이틀과 기획의도를 두고 재차 대립하게 되고 K로부터 코끼리 무덤이 담긴 촬영 테이프가 홍 PD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 PD는 평소 경쟁관계로 홍 PD를 껄끄럽게 보던 차라 심한 충격을 받고 코끼리 방송을 접자고 한다.

홍의 신임이 두터운 국장이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로 방송을 내보내라고 내 기획안에 손을 들어주자 조 PD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나는 A 제작팀을 떠나거나 방영이 되어도 조 PD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다. 내 심기를 알아챈 K가 홍 PD에게 테이프를 받아와 중재에 나서자 조 PD는 코끼리 무덤이 담긴 촬영 테이프 전부를 보게 되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조 PD가 이번 방송의 취지를 받아들이며 방송 OK 사인을 내린다.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가 방송되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마침맞게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문제와 시의성이 들어맞아 2020년 방송국 다큐멘터리 중 최고의 시청률로 평가받는다. 부분 캡처로 블로그에 올리는 사람들이 줄을 잇자 재방영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요청으로 재방영되었고, 해외 한인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저작권 계약이 쇄도한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는 철회되고 일본은 심한 유감을 표명한다.

● 당선소감

누구나 찬란한 인생에 도전할 수 있기를

이서안 씨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늦게 시작한 문학의 길이었습니다. 태곳적 하나였던 몸체가 떨어져 나가 감춰진 기억을 안고 그리움이 되어 저를 바라봤습니다. 무수한 시간의 편린들이 유영하는 빛의 굴절 속에서 삶의 굴곡진 서사들을 제대로 투영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소설이어야 하는가? 왜 써야 하는가? 수인의 시공간에서 바다에 잔류한 섬이 되어 멀어진 거리를 메우려고 애태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가슴 깊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사랑에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글쓰기의 지평을 넓혀가도록 기회를 주신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소설을 통해 진실을 조명할 수 있게 인도해주신 윤후명 선생님, 시대의 역사관을 일깨워준 황광수 선생님, 창작의 자세와 작가정신을 가르쳐주신 박상우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며 섬기며 영혼을 향한 몸부림으로 정진을 계속하는 시민공동체 지체들의 기도의 눈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리고 늘 나의 사랑 버팀목 남편 아들딸과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밝게 보도록 어린 동생을 지켜준 열이 오빠에게도 애정 어린 감사를 전합니다.

꿈을 재현하는 문학으로 우리의 나날이 결코 팍팍하지만 않음을, 누구에게나 찬란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도전의 기회가 있음을 살아있는 글쓰기로 구현하겠습니다.

△1963년 경남 마산 출생 △국민대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2017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심사평

박력있는 상상에 찬사… 압도적 신인 나왔다

황종연 씨(왼쪽)와 최수철 씨.
여덟 편의 본심 작품 중 당선작 외에 좋은 작품은 두 편이었다.

‘나의 선녀, 그레이스 켈리!’는 수년 전 베트남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외국인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세탁소를 하는 남자 이야기. 배우가 꿈이었다는 여자의 제안에 둘이서 밤마다 손님들의 옷을 골라 입고 즉흥 연극을 한다는 삽화가 눈에 띈다. 소설 전체 내용은 나무꾼과 선녀 설화의 리메이크다. 이주민 동네의 풍속 묘사도 약간 덧붙여져 읽는 재미가 있으나 연극 장면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약점, 베트남 여자 인물의 성격이 너무 희박하다는 약점을 무시하기 어렵다.

‘너의 월요일’은 근래 우리 소설에 유행 중인 레즈비언 서사의 일종이다. 이 작품이 얼마간 새롭다면 여성 유대의 동기를 어른들로부터 버려진 소녀들의 고통에서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소녀의 일인칭 서술이 지나치게 자기몰입적이라는 것, 갈망 연민 증오의 감정 표현이 따라가다가 지칠 정도로 과잉이라는 것이다.

‘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는 월등히 우수해서 당선작으로 뽑기까지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사라진 코끼리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남도 끝 작은 섬을 찾아간 다큐멘터리 PD. 코끼리가 아니라 수장된 코끼리 무덤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거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능숙하게 서술됐다. 신뢰와 불신 사이의 협곡으로 독자를 계속 끌고 가는 스토리텔링 기술, ‘조선왕조실록’의 몇 줄로부터 유토피아의 꿈에 도달하는 박력 있는 상상, 일본군 침략으로부터 섬을 지킨 ‘독립투사’ 코끼리라는 유머 등 여러 이유에서 찬사를 받을 만하다. 동아일보 중편소설 부문이 대형 신인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번에도 달성했다. 당선자가 앞으로 발표할 소설에 기대가 크다.

최수철 소설가·황종연 문학평론가
#동아일보#신춘문예#중편소설#그 섬에 코끼리가 산다#이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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