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형사재판소 헤이그 생활 12년… 도덕적 자기검열에 외로웠던 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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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前 국제형사재판소장 회고록 ‘고독한 도전…’ 출간
한국인 첫 재판관 이어 소장까지
공무 외에 사교적 접촉 삼가고 흠잡히지 않으려 철저하게 처신

2009년 송상현 당시 국제형사재판소장이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나남출판 제공
2009년 송상현 당시 국제형사재판소장이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나남출판 제공
일본 법 의존을 극복하고 새로운 법 강의를 개척한 법대 교수, 엄정한 재판관, 능란한 외교관, 현실감각이 뛰어난 국제정치가….

이 많은 수식어와 직업의 조합을 한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일 수 있을까.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79)이라면 가능하다. 35년간 서울대 법대 교수로 봉직하다가 2003년 재판소 초대 재판관과 2, 3대 재판소장을 맡아 12년간 국제무대를 누빈 인물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고하 송진우 선생의 손자인 그가 최근 ‘고독한 도전, 정의의 길을 열다’(나남출판)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내놓았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이 책은 그가 출생 때부터 재판소장직을 수행하고 퇴임할 때까지의 긴 여정을 담고 있다. 6·25전쟁을 겪은 어린 시절과 고등고시 행정과와 사법과에 연이어 합격하고 미국 유학 후 서울대 법대 교수에 임용된 것 등의 일대기는 일인칭 소설처럼 흥미롭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12년간의 국제형사재판소에서의 활약이다.

2002년 국제형사재판소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되자 그는 정부의 추천으로 이듬해 초대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그도 감개무량했는지 “정의를 통한 평화의 실현을 위하여 인류에게 봉사하는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나에게는 새로운 도약의 순간이고, 인생의 과정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다”라고 적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으로 전쟁, 침략, 집단학살, 반인도적 범죄 등 네 가지 중범죄를 범한 권력자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처벌하는 ‘로마 규정’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국제사법기구였다.

그는 2009년 제2대 소장이 됐다. 한국인이 신설된 지 얼마 안 되는 국제기구의 최고책임자 자리에 오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어 2012년 소장 선거에서 재선됐다.

재판소장은 그냥 법대 위에 앉아 엄숙하게 판결만 내면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회원국을 확대하기 위해 100개국 이상의 국가원수들과 정상회담을 했고 123개국 회원국의 대사와 날마다 상대해야 하는 외교관이었다. 또 재판소로 쏟아지는 각국의 정치적 압력을 이겨내야 하는 정치인이었다. 심지어 리비아의 카다피 아들 사건 때문에 리비아로 갔던 재판소 직원 4명이 한 달 가까이 구금되자 직접 리비아로 날아가 이들을 데리고 무사 귀환한 협상가이기도 했다.

재판소장직을 수행하며 겉으로는 화려한 명성을 얻은 그였지만 흠 잡히지 않기 위해 철저한 처신으로 일관했다. 그는 “공과 사를 구별해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웃음으로 대하되 말을 조심하고, 공무 외에 일체의 사교적 접촉을 삼갔다. 헤이그 생활 12년은 도덕적 자기 검열 때문에 외롭고 힘든 세월이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퇴임할 무렵 네덜란드 정부는 최고 훈장인 ‘기사대십자훈장’을 수여했고 네덜란드에 영구 거주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2015년 유엔총회에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결의안을 심의할 때 유엔 주재 네덜란드대사는 “송상현 소장은 국제형사재판소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진정한 국제 정의의 챔피언”이라고 격찬했다.

2015년 퇴임한 그는 국내로 돌아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일 말고는 ‘완전 실업자의 묘미를 즐기겠다’고 했으나 원고지 5000장이 넘는 회고록 집필에 힘을 쏟았다. 회고록은 그의 개인 기록이기도 하지만 국제형사재판소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 회고록#고독한 도전 정의의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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