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규칙 사소히 여기다 참사의 ‘공범’ 된 사람들[광화문에서/신광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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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신광영 사회부 차장
두 살 아이가 세상을 뜬 지난달 17일 아침, 광주 운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횡단보도로 되돌아가 본다.

주변 폐쇄회로(CC)TV에 찍힌 사고 발생 시각은 오전 8시 40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이 많은 때였다. 어린이보호구역에 놓인 횡단보도에서 유모차를 끄는 30대 여성이 네 살 딸과 함께 건너고 있었다. 유모차에 두 살 둘째딸과 생후 6개월 된 아들이 타고 있었다.

엄마와 세 자녀는 서로 꼭 붙어 있어 한 몸처럼 보였다. 이들이 신호등이 없는 왕복 4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중간쯤 건너왔을 때였다. CCTV 화면에서 갑자기 엄마와 세 자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육중한 8.5t 화물트럭이 와 있었다.

트럭이 네 사람을 덮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눈을 다시 떴을 땐 유모차가 트럭 바퀴 틈에 구겨져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영상을 10~20초 뒤로 되감았다. 이 사건의 결정적 장면 하나가 거기 있었다.

횡단보도 중앙까지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는 나머지 절반을 건너기 위해 우측에 차가 오는지 살피고 있었다. 네 살 큰딸은 6, 7m 떨어진 횡단보도 끝에 나와 있던 어린이집 교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는 한 손으로 큰딸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잡은 채 남은 6, 7m를 건너갈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들 앞으로 차량 10여 대가 무심히 지나갔다. 엄마와 세 자녀는 밀려드는 차들을 보고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물러설수록 8.5t 트럭과 점점 가까워졌다. 곧 어떤 일이 닥칠지 알고 있어서인지 이들이 횡단보도에 갇혔던 10초가량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횡단보도 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치다 급기야 트럭에 치이고 마는 장면에서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유모차에 있던 두 살 둘째딸이 숨지고, 네 살 큰딸과 엄마는 중상을 입었다.

사고 현장에 있던 한 노인은 이 참상을 바라보던 일곱 살 손자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손자는 5개월 전 같은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인 뒤 겨우 회복해 그날 처음 다시 등교하던 길이었다. 아이의 눈에 세상은 어떤 곳으로 비칠까.

경찰은 주변 CCTV와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해 엄마와 세 자녀를 보고도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간 차량 5대를 특정했다. 운전자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건너려는 사람이 있으면 다 건널 때까지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엄마와 세 자녀를 위험으로 내몬 운전자 5명은 사고의 간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평범한 사람도 작은 규칙을 사소히 여기면 언제든 참사의 ‘공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두 살 아이의 가슴 아픈 희생을 보며 절감한다. 나 역시 운전대를 잡고 횡단보도를 무심코 지나쳤던 적이 종종 있었다.

운전자 5명에게 내려진 처분은 교통 범칙금 12만 원이 전부다. 언니의 어린이집 등원길에 함께 나섰다가 숨진 두 살 아이, 중상에서 회복한 후에도 후유증과 죄책감에 시달릴 엄마와 남매의 앞날을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경찰이 ‘보행자 보호 의무 위반’으로 범칙금을 통지하면 화를 내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운전자가 많은데 그 5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날 아침 횡단보도로 다시 되돌아가 본다. 차 5대 중 1대만이라도 위태롭게 서성이던 엄마와 세 자녀 앞에서 멈춰 섰더라면…. 규칙을 지키는 운전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교통사고#신호등#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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