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그 고통의 비대칭[동아 시론/남궁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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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한 사연으로 붐비는 응급실
얼어붙은 마음에 더해진 우울-고달픔
코로나가 감춰진 ‘삶의 무게’ 드러내
바이러스가 부른 고통은 약자 몫이었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올해 초 신종 바이러스 팬데믹이 찾아왔다. 응급실은 비상 상황인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바이러스에 대해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환자를 어떻게 진료해야 할지 갈피를 잡아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경계심에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개인위생에 힘썼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고 응급실 환자 또한 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응급실 업무는 오히려 늘었다. 일단 우리는 그전까지 별다른 조치 없이 수용하던 감염 의심 환자에게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어떤 환자가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발열이나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 해외 체류 이력과 확진자 접촉력이 있는 사람이 우선 고려됐다. 하지만 응급실에는 의식이 떨어져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 찾아왔다. 본인의 상태를 직접 설명할 수 없는 사람 또한 희박하지만 감염 확률이 있었다. 발열 및 의식 저하로 찾아온 고령의 환자는 당연히 우선 격리해서 진료했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음독을 시도하거나 자해한 사람 또한 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도 방역 대상이었다.

삼엄한 응급실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던 사람은 이전보다 더 늘었다. 얼어붙은 사회 분위기에 외출이 어렵고 교류가 사라지면서 감정적으로 힘겨웠던 사람에게 더욱 견디기 어려운 우울과 고달픔이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기저에는 남은 사람을 배려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유독 많은 자살의도자가 음압실에 격리돼 방역 자원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들이 과연 방역 대상인가 반문하면서도 매번 음압실을 마련하고 방역복을 입어야 했다. 의문스러운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사회적으로 힘든 분위기니 자제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응급실 방역은 자리를 잡아갔다. 음압실에서 환자를 검사한 뒤 방역복을 입고 음성 확인까지 진료하는 프로토콜이 확립됐다. 응급실은 안정돼 갔지만 입구에는 대단히 높은 문턱이 생겼다. 이전에는 별문제 없이 가깝거나 평소 다니던 병원에서 수용 가능했던 환자들의 병원 방문이 어려워졌다. 감염 증상이 있거나 의식이 떨어지면 수용 여부를 확인하고서야 환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음압실은 거의 항상 만실이었다. 상태가 악화되면 열이 나는 중환자나 요양원 환자 또한 매번 격리와 검사가 필요했다. 수용 문의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지만 거절하는 일이 주요 업무가 되었다. 때때로 먼 곳에서 걸려온 전화는 상황을 짐작하게 했고 가끔 도로를 배회하다 상태가 나빠진 환자가 기사화됐다. 실제 건강한 사람들은 음성을 확인한 뒤 나머지 진료를 이어갔으나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다. 병원에 생긴 문턱은 그전부터 투병하던 사람들의 고통으로 귀결되었다.

그동안 바이러스는 주로 소수자나 약자를 휩쓸었다. 콜센터 물류센터 직원, 성소수자, 정신병원이나 요양병원 입원 환자, 특정 종교인. 그들에게 바이러스는 훨씬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우리는 유행의 시기마다 환자들에게 그들의 소속이나 거주지, 종교를 물어야 했다. 이들 중 평소 투병하던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는 치명적이었다. 낙후된 병원 내 감염은 곧 집단 사망으로 이어졌다. 바이러스로 인한 직접적인 고통이자 떠들썩한 집단적 유행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의 몫이었다.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가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노약자가 여전히 가중된 고통을 받는 시점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실직하고 집에서 술만 마시다가 실려와 간질환을 진단받고도 고집스럽게 돌아가는 환자, 익숙하지 않은 육체노동을 하다가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환자, 정신과적 질환이 악화돼 커다란 위기를 겪는 환자들 또한 있었다. 하나같이 절절한 사연이었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힘겨운 사람은 이전부터 위태로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고통 또한 숨겨진 곳에 있다가 응급실에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유사 이래 위기는 평등하게 찾아온 적이 없다. 결국 정신적으로 힘겹거나 신체가 온전치 못하거나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던 사람들에게 팬데믹은 더 큰 위기로 다가왔다. 응급실이라는 사회의 한 공간에서 그 고통의 비대칭을 명백히 바라보고 체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들에게 삶과 감정이 지닌 무게는 더 커졌다. 삶을 그럭저럭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와 닿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다. 이를 분명히 신종 바이러스가 야기한 양극화로 생각할 수 있다. 무차별적인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받던 사람들이 확실히 더 고통스러워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코로나 팬데믹#코로나19#양극화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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