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 정미조 3년만에 컴백 “일흔한해…바람 같은 날들이었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3일 16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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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약 어느 날에 양희은의 절창에 식은 가슴 덥힌 적 있다면, 최백호의 떨림에 빈 술잔 채운 적이 있다면. 이제 정미조(71)의 노래에 귀를 기울일 차례다.

정 씨가 3년 만에 낸 신작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10일 발매)는 청자를 억새풀 가득한 언덕으로, 열두 개의 산책 코스로 이끈다. 시계태엽, 괘종시계, 풍금 소리가 마치 핑크 플로이드의 소품처럼 정 씨의 가창과 뒤얽히는 첫 곡 ‘습관처럼’의 다락방을 나서자마자 ‘오늘 우리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네’라 읊는 ‘석별’부터 감정의 파고가 들이닥친다. 근래 음악성보다 오락성을 앞세운 트로트 재조명 속에 잊힌 고품격 성인 가요의 진경이 펼쳐진다.

17일 만난 정 씨는 “1970년대엔 그저 무대가 신기하고 신나 노래했다면 이젠 가창력이 아닌 영혼을 전달한다는 느낌으로 노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2년,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해에 TBC ‘쇼쇼쇼’에 출연해 ‘My Way’를 부른 게 정 씨의 처음이었다. 큰 키, 폭발적 가창력, 높은 학력 덕에 ‘대형 가수’ ‘제2의 패티김’ ‘학사 가수’란 수사가 쏟아졌다.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을 히트시킨 뒤 1977년 돌연 활동 중단. 1979년 프랑스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아르 데코를 거쳐 파리 7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13년 세월 동안 혈혈단신이었어요. 독한 우울증도 겪었죠. 외로울 때면 센 강가를 거닐며 혼자 ‘Les feuilles mortes(고엽)’를 불렀어요.”

1992년 귀국해 2015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미술가, 교수로 살았다. 최백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현 소속사(JNH뮤직) 이주엽 대표의 권유로 말 그대로 무려 37년 만의 가수 복귀작 ‘37년’(2016년)을 준비할 때 누군가는 “노래? 교수로 퇴임한 그대로, 명예로운 은퇴자로 살라”고 조언했다. 음반이 나오자 놀랄 일이 벌어졌다. 김동률이 소셜미디어서비스(SNS)에 극찬하더니 선우정아는 ‘귀로’를 자기 공연의 앙코르에 불렀고 아이유는 ‘개여울’을 리메이크했다. 평단의 극찬도 따라왔다.

“‘37년’은 그저 좋은 기록물, 추억거리를 남기자는 생각으로 만든 앨범이에요. 제3의 예술세계가 열리는 문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미술이 물감을 쓴다면 음악은 멜로디를 쓸 뿐, 예술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똑같죠.”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 ‘다음 생엔 그냥 스쳐 가기만 해요’ ‘삶에 감사를’ ‘한 번 더’…. 신작엔 삶을 반추하는 진한 멜랑콜리를 담은 트랙이 다수다. 그러나 템포와 리듬감이 돋보이는 ‘너의 웃음’ ‘시시한 이야기’의 밝은 화풍이 캔버스의 균형을 잡는다. 세련된 샹송, MPB(브라질 팝), 시티팝을 틀고 드라이브하는 느낌. 프로듀서 손성제를 비롯해 전진희 이규호 유현곤이 곡과 가사 일부를, 이주엽이 대부분의 가사를 썼다.

후반부에 연속되는 ‘너는 날아’와 ‘다시 태어나면’은 유럽 아트록(art rock)의 모음곡 같은 절경. 전자는 다른 악기를 과감히 빼고 트럼펫, 코넷, 트럼본, 유포니움, 튜바를 전진배치했다. 나부끼는 금관악기의 순정률 군락 사이로 스네어드럼이 장례행렬처럼 진군하면 정 씨는 ‘손 끝만 스쳐가도 부서질 것 같던 그날’을 노래한다. ‘다시 태어나면’에서는 파도소리와 내레이션까지 갈마들며 감각의 경계를 허문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연습했죠 평생 노래 연습을 가장 많이 하고 만든 앨범입니다. 정작 녹음 때 목이 쉬어 애를 먹었을 정도로요.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를 연습할 땐 (가사가 슬퍼)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와 펑펑 울기도 했지요.”

그는 “한 발짝이면 저승길, 여한은 없다”고 했다.

“젊었을 때보다도 소리가 더 뻥뻥 잘 나와 어리둥절할 지경이에요. 너무도 감사한 일이죠. 제 건강이, 여건이, 삶이 허락하는 한 노래할 거예요.”

정 씨의 미술세계는 파리 야경 연작에서 귀국 후 서울 야경 시리즈로 이어졌다. 이제 노래의 붓으로 인생의 야경을 칠해간다. 허허한 캔버스를 휘황하게.

임희윤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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