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1998년처럼[동아 시론/박훈]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0-11-19 03:00수정 2020-11-19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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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죄 끌어낸 ‘김대중-오부치 선언’
차분하게 협상 조율한 자신감이 비결
‘김대중 계승자’들은 무얼 이어받았나
1998년처럼 한국이 양국관계 리드하자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지배 35년간입니다. 이렇게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토착왜구의 말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그것도 1998년 일본 국회에서 한 연설에서다.

김대중 사후 그에 대한 평가가 비판진영에서도 달라지는 분위기다. 현재의 국제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노련한 전략적 마인드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대중의 전략가 기질은 특히 대일정책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 결과가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를 만나 일본문화 개방을 약속하는 등 파격적인 내용에 합의했다. 나는 이 문서가 한일관계의 ‘헌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선언문의 모두에 나오는 문장이다. 인터넷을 조금만 살펴봐도 알겠지만 이 외에도 천황, 총리, 의회 등 일본을 대표하는 국가기관들이 식민지배에 대해 여러 번 사과했다.

세계적으로 독일처럼 전쟁 도발국이 사죄한 적은 있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한 나라는 없다시피 하다. 열강 대부분이 식민지배의 공범이니 열강이 만든 국제법에 그에 대한 배상이나 징벌 조항은 전혀 없다. 그렇게 보면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한 드문 예이고, 우리는 옛 식민종주국에 사과를 받아낸 거의 유일한 나라다. 이런 말에 당혹스러워할 한국인들이 많겠지만 사실이다. 그 진정성이야 어떻든 간에 한국 외교의 힘과 전후 일본 사회의 양식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김대중은 그 연장선상에서 다시 한 번 일본에 통절한 사과를 요구했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과 달리, 패전 후 새롭게 태어난 일본이 세계와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공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선언문 3항).

그러고는 금단의 영역이었던 일본문화에 대해 빗장을 풀어 제쳤다.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지지 기반인 진보진영에서 ‘왜색(倭色)문화가 전 국민을 친일파로 만들 것’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대중이 친일파고 토착왜구라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일까. 22년이 지난 지금 한일 문화시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고,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년의 반대투사들은 조용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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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동선언문의 행간을 시종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자신감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1965년 국력 차가 극심했던 국교 정상화 협정 때의 나라가 아니었다. 광복 후 50여 년 만에 거대한 경제와 활기찬 민주주의를 다 거머쥔 나라였다. 그런 자신감이 김대중에게도 대한민국에도 있었다. 그것이 맘에 다 차진 않더라도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전후 일본이 나름대로 해 온 역할을 통 크게 인정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에도 위안부, 역사교과서, 독도 문제 등이 없었던 게 아니다. 김대중이 그런 문제들의 심각성을 몰랐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죽창가’를 부르지 않았다. 협상 어젠다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면서, 우리 민족의 도덕적 우월성을 유지하면서, 일본을 압박했고 존경을 이끌어냈다. 그의 계승자들은 도대체 김대중으로부터 무엇을 계승하고 있는가?

최근 우리 역사에서 익숙한 장면이 다시 펼쳐지려 하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이 움직이면서 그 파동이 고스란히 한반도에 닥치고 있다. 북한 핵문제와 한일관계 파탄은 그 전조다. 설마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후 워싱턴 회의(1921년)에서 굳게 손잡았던 미국과 일본은 불과 20년 만에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곤 싸움이 끝난 지 7년 만에 동맹을 맺었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굴러가는 게 국제정세다. 다시 찾아온 이 고차방정식을 풀기 위한 첫 단추는 한일관계다. 북한 핵문제는 우리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과제지만 한일관계는 다르다.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한일관계를 얕보면 안 된다. 한일관계는 거대한 체스판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 파탄은 단지 대한해협의 파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침 미국과 일본에 새 정권이 들어섰다. 우리 정부도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다. 1998년처럼 한국이 다시 한 번 리드하자.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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