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치유를 위한 문학 소통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홍인영 백석대 교수
홍인영 백석대 교수
“자 돈 여기 있어. 다시 데리러 올 테니 옷가지라도 준비해. 당장이라도 데리고 가고 싶지만 그런 꼴로 갈 순 없잖아.”

나는 돈을 받아 그의 얼굴에 내동댕이치고 그리고 그를 내쫓았다. 여섯 방의 식구들이 맨발로 뛰어나와 구경을 할 만큼 목이 터지게 악다구니를 치고 갖은 욕설을 퍼부어 그가 혼비백산 도망치게 만들었다.

“가엾게 스리, 미쳤구나.”(…)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내 가난을, 내 가난의 의미를 무슨 수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박완서, ‘도둑맞은 가난’ 중에서)

가난을 소명처럼 지켜온 ‘나’는 오 원짜리 풀빵 굽는 구루마 앞에서 만나 한 방에서 지내던 상훈이 실은 돈 귀한 줄을 알기 위해 가난뱅이짓을 한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상처를 받는다.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한 장면이다. 소설을 읽으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나’가 겪은 모욕과 수치, 그것이 남길 상처에 가슴 아파하며 자기 일처럼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반응을 누군가와 나눌 때 공감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인간은 이상하게 좋은 기억뿐 아니라 상처까지 소중히 여기지요.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 없는 비밀이랄까 아픔이면 더 그렇고요. 그건 아마 우리가 딱지의 크기나 모양이 아니라 그 아래 봉인된 진실,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지켜낸 사적 진실을 본능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까닭일 겁니다. (…) 저 화자처럼 “내 상처가 어떤 상처”라고 항변하며 두 손으로 감싸 안고픈 사연이 모두에게 조금씩 다 있지요?’

위 글은 ‘사이버문학광장’에서 ‘문장 배달’ 형식을 통해 연재된 김애란의 글(박완서 ‘도둑맞은 가난’)이다. ‘문장 배달’은 소설을 소개한 후 문학 집배원(대부분 작가가 맡는다)의 코멘트를 덧붙이는 형식의 메일링 서비스인데 위 글은 서두에서부터 ‘인간은’이라고 시작하면서 상처를 지니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독자와 공유한다. 그리고 작품의 화자가 한 말을 제시한 후 그것과 유사한 경험이 ‘모두에게 조금씩 다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코멘트를 읽는 동안 우리는 소설만 읽을 때보다 더 큰 위로를 받게 된다.

유례없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우울을 느끼고 있다. ‘코로나 블루’는 일상에 틈입(闖入)한다. ‘틈(闖)’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 문틈 사이로 느닷없이 함부로 들어오는 우울을 다스리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우울감 해소를 위해 여느 때보다 소통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또 여느 때보다 (대면) 소통이 어려운 이때, 문학을 읽고 짧은 생각을 나누는 비대면 소통을 제안해 본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하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즐기는 본성을 갖고 있다. 철학자 리쾨르(P. Ricoeur)는 이것을 ‘줄거리 만들기(emplotment·플롯 구성하기)’라고 불렀다. 인간이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들은 불연속적으로 흩어져 있는데 그 경험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것, 즉 처음-중간-끝으로 이루어진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 인간 사고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은 서술(narrative)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의미화해 나간다.

문학작품을 읽은 한 명의 독자는 그것으로부터 자기 나름의 줄거리(이야기)를 만들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치유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또 다른 독자와 나눌 때 공감과 위로의 크기는 더 커질 수 있다. 이와 같은 독서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은 저마다 지닌 개별적인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 문제로 인해 고통받는 것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은 삶에서 괴로움을 겪는 것이 혼자만이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위로이다. 코로나 시대의 우울은 누구도 바라지 않았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비대면 소통의 방식으로나마 문학작품에서 받은 감상을 나누면서 서로의 우울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고 머리를 맞대며 이야기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홍인영 백석대 교수
#공기업#기업#기고#한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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