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자연 풍광[이준식의 한시 한 수]〈72〉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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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자 들판은 아득히 넓고 눈길 닿는 끝까지 티끌 하나 없다./
성곽 대문은 나루터에 닿아 있고 마을 나무들은 시냇가까지 펼쳐졌다./
흰빛 물은 논밭 저 밖에서 반짝이고 푸른 봉우리 산 너머로 삐죽이 솟았다./
농사철이라 한가한 이 없이 온 집안이 나서서 남쪽 논밭을 가꾼다.
(新晴原野曠, 極目無뺼垢. 郭門臨渡頭, 村樹連溪口. 白水明田外, 碧峰出山後. 農月無閑人, 傾家事南畝.)

―‘비 갠 후 들판을 바라보며’(신청야망·新晴野望) 왕유(王維·701∼761)

비 갠 직후 더없이 명징한 들녘. 흔하게 맞닥뜨리기도 할 것 같은 풍경이련만 도시 생활의 오탁(汚濁)에 찌든 이들의 시야에서는 한참 멀어진 풍경이기도 하다. 미세먼지나 황사 따위의 위험 수치에 예민해진 탓에 청정한 자연의 기운을 끔찍이 그리면서도 정작 계절의 변화에는 둔감하기도 한 게 우리네 삶이다. 논밭 저 너머 보이는 물빛이 하얗다는 것도, 산빛이 신록에서 푸르름을 더해가다 마침내 벽록(碧綠)으로 짙어진다는 것도 새삼스러울 게 없는 자연 현상이건만 시인이 일러주는 순간, 아차 늘 엉뚱한 데로만 치달았던 우리의 눈길과 마음을 비로소 추스른다. 첨단의 소비문화에 길들여져 카페와 맛집의 지형을 좇느라 놓치고 살았던 풍광, 계절이 바뀌는 동안 변화무쌍을 거듭하는 풍광은 그제야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새삼 화사한 경이로움으로 다가설 것이다. 마치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처럼.(고은 ‘그 꽃’)

당대 산수전원시의 비조(鼻祖)답게 중년 이후 선종(禪宗)과 산수에 심취했던 왕유의 시는 자연 속에서의 한적과 무아무심(無我無心)의 경지를 노래한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작품은 의협심 강한 소년의 기개, 인재 등용의 부조리, 부녀자의 사회적 상처에도 관심을 갖는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준식#비 갠 후 들판을 바라보며#신청야망#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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