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순진하면서도 음흉한 사랑고백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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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이원하 지음/220쪽·1만4000원·달

“순진하면서도 음흉하고, 귀엽지만 어딘가 조금 무섭고, 애달프지만 위로받게 되는 사랑”이라는 황인찬 시인의 추천사가 이 엉뚱하고 독특한 산문집의 매력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첫 시집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로 문단 안팎의 이례적인 주목을 받은 이원하 시인이 연모의 마음에서 출발했던 자신의 시작(詩作) 뒷이야기를 산문으로 풀어냈다.

산문집은 시인이 좋아하는 한 대상(남성)과의 다양한 일화들과 그것이 한편의 시로 빚어지기까지 감정의 파장을 섬세히 그려낸다. 절절한 연심(戀心)이 산문으로 풀어진 경우는 많았지만, 발화자인 여성이 이토록 앙큼하게 들이대면서도 이렇다 할 결실(?)이 없어 상심하는 상황을 능청맞게 쓴 글은 거의 없었다. 이 산문집의 세계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유다.

“당신에게 놀아나는 내 인생이 나는 좋아요. 당신으로 탕진하는 내 삶이 나는 좋아요”라고 태연하고 명랑하게 읊조리다가 “그가 질질 흘리니까 내가 그의 집 우렁각시가 된 거예요. 그가 터뜨린 자동차 바퀴를 몰래 해결하는 거예요. 그에게 따라붙은 스토커를 조용히 해결하는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평생 당신은 나에게 의존하면 돼요”라고 구슬린다. 곰 인형을 껴안고 잠을 청하다가 “곰 인형이 좀 이렇긴 해도, 나에게 모든 걸 맡긴 곰 인형과는 벌써 갈 데까지 갔어요. 그러니 당신도 내게 모든 걸 맡기세요”라고 도발하기도 한다.

그의 시처럼 산문 역시 문장과 문장이 빚어내는 긴장과 운율감이 기발하고 유머러스하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이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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