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말 오일쇼크, 물가폭등으로 박정희 정권 벼랑 위로

동아일보 입력 2013-08-09 03:00수정 2013-08-0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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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87>인플레이션
1978년 12월 한국사회를 강타한 제2차 오일쇼크는 다시 서민들의 삶을 고통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자고 나면 오르는 기름값 때문에 택시회사와 기사들 사이에는 지입금 시비가 일어 아예 번호판을 떼고 세무서에 휴업계를 내는 곳도 있었다. 동아일보DB
중동특수 효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6년부터 79년까지 한국 경제는 사상 최대 호황을 기록한다. 성장률은 1976년 10.6%, 77년 10.0%, 78년 9.3%였다. 78년에는 1인당 GNP가 1000달러를 넘어 당초 계획보다 2년이나 앞선다.

하지만 ‘수치로만 배부른 고도성장’(79년 4월 9일자 동아일보)이었다. 살인적인 물가고로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경기 과열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도 극성을 부렸다. 신규 아파트 값은 분양 즉시 폭등했다. ‘복부인’ ‘프리미엄’이란 신조어가 이때 등장했다.

78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렇게 전한다.

“모자라는 것은 시멘트뿐이 아니다. 합판 철근 타일 등 건축자재 부족은 오래전부터 일어났고 요즘에는 중간 원자재와 내구 소비재 심지어 청량음료에까지 엄청난 수요가 일고 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연말께 가서 국내 경기는 당초 10.5%로 책정했던 경제성장률을 훨씬 앞질러 15% 선에 이르지 않겠느냐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정책 당국은 하루빨리 장기 계획에 입각해서 전면적으로 주요 물자의 수급 계획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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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조순 전 서울시장도 동아일보를 통해 “(한국은) 고도성장에 대한 반성이라는 합리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마침내 국민경제의 성장잠재력 자체를 잠식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명을 지르고 있던 서민들에게 선거 직후인 78년 12월 제2차 오일쇼크까지 덮쳤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때부터 이듬해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원유가를 올린 것이다.

호황을 노래해오던 유신정권의 경제기조는 삽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모든 물가를 통제하던 정부는 79년 3월에 국내 석유제품 가격을 9.5% 인상한 데 이어 7월에 다시 59%나 올렸고, 전력요금도 35%나 인상했다. 최종적으로 1979년 소비자물가 인상률은 21%나 됐다.

79년 4월 9일자 동아일보는 ‘과(過) 성장 16년 황(黃) 신호 걸린 한국경제’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물을 연재하는데 기사에 소개된 중견 섬유업체 기능사원 M 씨(36)의 사연은 당시 중산층의 대표적인 삶으로 여겨진다.

“공고 졸업인 M 씨 봉급은 세금 등을 빼고 나면 월 15만 원. 이것으로 노모와 어린 두 자녀, 아내 그리고 고교생인 남동생 등 6식구 생계를 꾸려가면서 작년 봄까지만 해도 월 2만 원씩을 저축했으나 올해에는 저축은커녕 다달이 생계를 잇기조차 어렵다. 경제는 해마다 고도성장을 한다는데 어째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르기만 하는지, 왜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지는지 의문에 잠기게 된다. 고도성장에 회의를 품는 사람은 M 씨뿐이 아니다. 작년 이래 엄청난 물가고와 유례없는 투기 붐, 걸핏하면 빚어지는 생필품 파동에 시달려온 저소득 서민들은 누구나 과연 고도성장이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잠겨 있다.”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사재기도 판을 쳤다. 79년 7월 11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유류 값 및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 관련 제품 값도 최고 48%까지 인상 발표되자 아파트 등 고급 주택가 수퍼마켓 상가 등에서는 비누 화장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을 리어카와 용달차로 한 차씩 사들이는 ‘사재기’가 또다시 극성이고 버스요금 인상설에 자극돼 미리 쇠표(토큰)를 사두려는 시민들이 판매소에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퍼지지 않고 있다는 노동자들의 항변이 갈수록 뜨거워져 기폭점(起爆點)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노동삼권이 제한된 엄혹한 환경이었지만 1972년 346건이던 노동쟁의는 1973년 666건, 1975년 1045건, 1976년 754건, 1977년 1864건, 1979년 1697건으로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한국노총 산하 조합원 수도 1970년 49만 명에서 1979년 109만 명으로 늘었다.

안팎으로 정권을 흔드는 위기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78년 7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의원 2578명 중에 반대표는 단 한 표도 없었고 무효표만 한 표가 나왔다. 하지만 5개월 뒤인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달랐다. 득표율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31.7%,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얻어 야당이 1.1%포인트 앞서는 헌정사상 처음 이변이 일어났다. 전국 154개 지역구 중 민주공화당이 68명 당선되었는데 야당인 신민당도 61명이나 당선됐다. 특히 무소속 득표율이 28.1%나 돼 제2야당이었던 통일당(7.38%)과 합치면 오히려 공화당이나 신민당을 앞서는 진기록이 연출된다. 민심은 이미 박 정권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 명백히 확인된 셈이었다.

시민들의 정치의식도 높아졌다. 투표율이 77.1%로 9대 때보다 4.2%포인트나 높았다. 서울의 경우에는 9대 때 62.0%보다 6%포인트나 높은 68.1%에 달했다. 78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과거에는 대도시에서 야당이 우세하고 지방에서 여당이 우세했는데 이번 결과를 보면 야당이 지방에서도 우세하여 소위 ‘여촌야도(與村野都)’ 경향이 현저하게 변한 사실을 보여준다. 국토개발과 텔레비전 보급 확대로 지방의 정치의식이 상당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떻든 78년 말 10대 총선은 집권 여당인 공화당의 명백한 패배였다.

“선거에 진 요인에 대해 김재규 정보부장이 이끄는 정보부와 당, 그리고 경찰에서 보고가 올라왔는데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장덕진의 경제 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부가가치세 실시, 물가상승, 그리고 노풍(魯豊)이라는 새 품종 벼가 멸종되어 국민 불만이 커져 패배했다는 것이었다.”(김정렴 회고록)

결국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 경제팀이 경질되고 신현확 신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지휘봉을 잡는다. 하지만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총선에서 힘을 받은 야당은 기고만장해지며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 수감되어 서울대병원에서 연금생활을 하던 김대중도 박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8년 12월 27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면서 제일성으로 “민주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에 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권토중래를 꿈꾸던 김영삼도 박 대통령과의 전면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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