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박경리 딸 김영주와 결혼… 주례 김수환 추기경

동아일보 입력 2013-06-19 03:00수정 2013-06-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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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0>청혼
1973년 4월 7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의 주례로 결혼하는 김지하와 김영주. 김지하 제공
1973년 1월 어느 날 김지하가 몸을 피해 머물고 있던 원주 집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박경리 선생과 딸 김영주였다.

모녀는 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날 “숨겨 달라”던 김지하를 그냥 떠나보낸 게 못내 마음에 걸려 일부러 내려왔다고 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모녀를 돌려보내고 김지하는 원주에 머물렀다.

그런데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몇 발짝에 한 번씩 기침이 터졌다. 김지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마산병원으로 갔다. X선 검사를 했더니 기흉(가슴막 안에 공기가 찬 상태)이었다.

당시 기흉과 각혈 환자는 어느 곳 어느 병원에서든 즉각 입원시켜 치료해줘야 했다. 김지하는 바로 입원했고 오른쪽 가슴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박고 공기를 뽑아내는 수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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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을 마치자 중앙정보부 마산분실장이 달려왔다. 김지하는 2층 병실로 옮겨졌다. 다시 병원생활이 시작됐다. 병원에서 73년 봄을 넘기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겉으로 보기에 절대권력은 공고해 보였다. 구속적부심제도와 법원의 위헌심사권도 없어졌고 법관의 임명보직권도 대통령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국정감사권까지도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균열은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73년 4월에 ‘윤필용 사건’이 터진 것이다. 육사 8기의 선두주자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실세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 일은 실제로는 군 내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지원하는 윤필용과 반대세력 간의 권력투쟁이었고, 이때 거세된 윤필용은 후일 전두환 대통령의 등장으로 부활하게 된다.

당시 군법회의는 윤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에게 모반죄가 아닌 횡령 및 뇌물수수죄를 적용해 징역 1∼15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 판결을 확정했다. 윤 사령관은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데 이어 1980년 특별 사면됐다. 석방된 뒤에는 한국도로공사 사장과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다 2010년 작고했다.

윤 사령관의 아들은 2010년 8월 고등군사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다. 2012년 2월 22일 서울고법은 부대 운영비를 횡령하고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업무상 횡령 등)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윤 사령관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73년 2월 김지하는 서울 인사동 2층 찻집 어둑한 귀퉁이에서 서투른 몇 마디로 청혼을 하고 곧 약혼한다. 그는 약혼식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내 마음속 칼을 내리며 술을 많이많이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흰 윗도리며 푸른 조끼 위에 얼굴이 새빨간 한 못난이가 술에 취해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모습이 별로 깍듯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73년 4월 7일 명동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한다. 추기경은 강론에서 부부간의 예절과 함께 김지하 시인의 고난에 찬 앞길을 예감했는지 비상한 결심과 각오를 강조했다. 두 사람은 청평호반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매일 새벽 눈을 떴을 때 곁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기이할 정도로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첫째 안정감이었고, 둘째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셋째 깊은 자기긍정이었다.”

김지하는 결혼 후 원주교구에서 재해대책위원회와 기획실에서 일했다. 행복했고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내는 이내 첫 아기를 가졌다.

김지하는 당시 두 가지 일을 했다. 광범위한 민중교육과 조직운동, 다른 하나는 농어민과 영세민의 계몽을 위한 선전 드라마를 쓰고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종교를 통한 반정부 운동을 생각했다.

가톨릭은 세계적으로 긴밀히 조직되고 체계화된 준(準)국가조직이므로 정권이 가톨릭을 건드리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자살을 뜻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국내적으로도 가톨릭이 움직이면 개신교가 움직이고, 개신교가 움직이면 자유민주주의 단체나 개인들이 움직일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불교도 움직이고, 이어서 지식인들까지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다각적인 판단이 섰다.

그 무렵 지학순 주교는 자주 출국하여 해외의 여러 사람과도 접촉했다. 그러던 중 한청동(재일한국청년동맹·4·19혁명을 계기로 조국의 민주적 발전과 통일 실현을 목표로 삼은 재일 한국 청년운동체) 대표 20여 명이 입국해 원주교구청을 방문했다.

김지하는 그들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장점을 다 함께 포용하고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하는 새 차원의 민중민족철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또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청동은 이듬해 봄 김지하가 구속된 뒤 일본 내에서의 구명운동과 반(反)유신운동의 주역이 된다.

김지하는 이 무렵 외신과 인터뷰도 많이 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은 물론이고 일본 독일 스웨덴 프랑스의 언론과도 인터뷰를 하면서 전통사상과 예술, 당시 우리의 처지와 희망을 알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마음의 평화였다. 그러나 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혼 4개월로 접어든 8월,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어지는 정치적 사건이 터지니 김지하의 삶도 점점 격동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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