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끼리 손잡고… 집 나가는 식민지 조선의 며느리들, 왜?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9일 03시 00분


■ 김명숙 동덕여대 교수 분석

1927년 3월 8일자 동아일보
1927년 3월 8일자 동아일보
‘춘풍(春風)에 바람나는 젊은 여자 출분(出奔·가출)… 남편 버리고 작구(자꾸) 다러난다(달아난다).’

동아일보 1927년 3월 8일자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1920, 30년대 조선에서는 여성의 가출이 부쩍 늘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주요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했다. 이를 반영하듯 나도향의 ‘어머니’(1925년), 김동인의 ‘무능자의 아내’(1930년) 등 여성의 가출을 소재로 한 소설도 나왔다.

김명숙 동덕여대 국사학과 교수는 17일 열린 한국여성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1920, 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여성 출분 연구’를 발표하면서 “당시 주로 20세 안팎의 젊은 여성들이 유교적 가정규범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에 대한 갈망, 가정불화, 경제난, 근대문화와 도시에 대한 동경 등을 이유로 집을 나갔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가 1920, 30년대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 게재된 여성 가출 기사를 조사한 결과 1923년부터 여성 가출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함흥지역만 보면 1935년 5월 79명, 1936년 3월 343명, 5월 210명의 여성이 가출했다. 기사 가운데 나이와 결혼 여부가 기록된 가출 여성 125명을 보면 기혼여성이 59.2%(74명)로 미혼여성(40.8%·51명)보다 많았다. 미혼여성은 11∼19세, 기혼여성은 15∼29세의 가출이 많았다. 또 도시보다는 농촌지역 하층여성의 가출이 더 많았다.

어린 여성의 가출이 많았던 원인으로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조혼(早婚) 풍습을 들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 일제의 침략전쟁까지 확대되면서 궁핍해진 민중의 생존전략 중 하나가 조혼이었다. 무산계급의 어린 여성과 유산계급의 연상 남성이 결혼하는 민며느리제가 대표적 조혼 형태였다. 어린 며느리들은 모진 시집살이를 못 이겨 가출을 선택했다. 시집살이가 싫어 동서가 서로 손잡고 함께 가출했다는 동아일보 기사도 있다.

극심한 경제난도 여성의 가출을 부추겼다. 농촌에서는 춘궁기 경제난과 가정불화로 가출하는 여성이 날로 증가했다. “부산 공장에 가서 돈벌이를 하겠다”며 집을 나간 사례도 있었다. 김 교수는 “도시보다 시골 여성들의 가출이 더 많았던 것은 화려한 도시와 근대에의 동경을 나타낸다”고 해석했다.

자아실현을 꿈꾸며 집을 나가기도 했다. 평생의 소원인 공부를 하기 위해 자매가 함께 서울로 가출한 사례,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주교 신앙을 지키려고 가출한 사례도 있었다.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의 사상이 퍼지면서 여성들이 자기 의지대로 배우자를 선택하고자 강제 결혼을 거부하고 집을 나가기도 했다. 성(性) 문제를 이유로 남편을 버리고 떠난 여성도 적지 않았다.

김 교수는 “당시 여성들의 출분은 극단적 상황에서 자기 해방을 위한 탈출구였다”며 “소수의 부르주아 신여성들이 주도한 자유주의와 모더니즘이 향촌의 부녀자들에게까지 파급돼 여성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근대를 살고자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