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드라마캐릭터열전⑪ 환상 속의 ‘까도남’ 김주원

  • Array
  • 입력 2010년 12월 20일 10시 12분


코멘트

세상이 시시해 보이고 사는 것이 재미없는 남자에게 고민이 생겼다. 듣도 보도 못한, 속칭 '듣보잡'에 지나지 않는 여자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칼에 찔려 상처가 나고 피가 흘러도 좀처럼 놀라지 않는, 여자 같지 않은 여자 때문에 세상이 이상해 보인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그 스스로 "미친 것 아닌가?"라고 자문해 보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제 아무리 뛰어난 미모를 자랑해도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던 그였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재벌 2세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수트가 잘 어울리는, 멋지고 잘 생긴 데다가 능력까지 출중한 그는 '로맨틱 판타지 멜로'를 표방한 '시크릿 가든'(김은숙 극본, 신우철 연출)의 주인공 김주원(현빈 분)이다. '시크릿 가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감정 때문에 혼란에 빠진, 하지만 그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재벌 2세 김주원의 사랑 방정식을 환상적으로 형상화한 드라마다.

'고민'이라는 단어를 모를 것 같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 김주원이 끈 떨어진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 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상황은 이미 그 자체로 비현실이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영혼이 바뀔 정도로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절대 소통하지 못할 것 같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해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대단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김주원이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처지의 길라임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단 한 번의 부딪힘 탓이었지만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산책하거나 독서 중일 때는 물론, 통화 중에도 수시로 떠오르는 그녀의 환영 때문에 김주원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까지 보면 김주원은 영락없는 재벌 2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주원은 대부분의 재벌 2세가 백마 탄 왕자님이 되어 신데렐라를 만나는 상황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캐릭터로 자리 잡는다. 가난한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정도로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갈망하는 기존의 재벌 2세와 달리 김주원은 왕자를 짝사랑하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치명적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인어공주를 이야기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경제적 신분의 격차 때문에 자신을 망가뜨리기 싫어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김주원은 매우 현실에 가까운 재벌 2세라 할 수 있다. 그가 아무리 경제적 격차에 기인한 신분 문제를 고민해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재벌 2세라는 자신의 존재 기반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길라임을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스턴트맨 훈련생이 되는 것도 사랑이라기보다 그녀를 향한 자기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감정은 경제적 여건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토대가 상부 구조를 결정하는 것처럼 물적 풍요가 감정의 여유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주원이 재벌 2세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돈을 자랑하는 것. 길라임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이 모두 경제적 여유에서 비롯한 자신감과 당당함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싸가지 없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심리 상태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거부하기 어려운 그만의 매력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원앓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길라임의 환영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김주원이 평소 소신과 달리 자신이 운영하는 백화점을 영화 촬영 장소로 협찬하는 상황은 재벌 2세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충실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길라임을 만나고 싶어서 그녀가 스턴트우먼으로 출연하는 액션 영화 촬영을 자신의 백화점에서 하게 하기 위해 비서실장에게 "그 왜 '이 안에 너 있다'하면서 막 울고 짜고 하는 것 말고, 검 같은 것 들고 휙휙 날라 다니고 하는 액션 있잖아요. 스턴트가 많이 필요한 그런 액션 쪽에 협찬을 하면 어떨까 싶은데"라고 말하는 김주원을 어떻게 싸가지 없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김주원은 자기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상처 받을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 정도로 자기애가 강한 인물이다. 영혼이 바뀐 상태에서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고개 숙이는 길라임에게 "턱을 내리고 우수에 찬 표정으로 걸어라. 내 머리를 어디다가 숙여! 지금은 내 머리도 내 거고 네 머리도 내 거다!"라고 소리치는 것도 자기애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김주원이 길라임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신데렐라'의 행복이 아니라 '인어공주'가 맞닥뜨렸던 불행의 씨앗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경제적 격차에서 비롯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무모하게 감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러나 '까칠하고 도도한 남자', 이른바 '까도남'으로 불릴 만큼 까다로운 성격의 김주원에게도 아픔은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는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폐소공포증을 앓고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를 개인주치의로 두고 있을 만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데 아직 그 이유는 드라마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촌이자 한류스타로 앙숙처럼 지내는 오스카(윤상현 분)조차 입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사고 때문에 폐소공포증에 걸린 것만은 분명하다. 그 사고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김주원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의 원인이 밝혀질 것이다.

훤칠한 외모에 귀하게 자란 티가 역력한, 그래서 때로는 싸가지 없어 보이지만 결코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트라우마가 어떻게 치유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미 그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던 그가 길라임과 영혼이 바뀌는 사건 이후, 약을 먹지 않고도 잘 지내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극적 상황을 통해 그에게 길라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김주원이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은 재벌 회장의 셋째 부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어머니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자란 그저 아이 낳아 잘 키워줄 인생의 전략적 파트너"라고 생각할 정도로 황폐한 그의 내면이 스턴트우먼 길라임에 의해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영혼 바꾸기'라는 환상적 사건을 통해 그에게 결핍된 하지만 길라임에게는 충만한 감성을 경험하면서 김주원은 스스로 강하게 부정하며 넘지 않으려 했던 선을 넘는다. 길라임의 몸을 통해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환상에서 현실로 자리를 이동하면서 "추억의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했지만, 김주원은 여전히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환상 그 자체일 뿐이다.

환상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의 대저택에서 현실 세계로 발을 옮기는 순간 화사한 햇빛 속에서 산란하는 이미지로 존재하는 김주원은 추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 시대 대중의 욕망이 만들어낸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사랑스러운 만큼 비현실적이기에 허망할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서의 김주원을 욕망하는 우리들은 지금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환상은 그 자체로 즐거운 정서적 체험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현실과의 대면의 방해하는 도피의 정서 체험이 되기도 하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환상을 갈구한다면 우리는 모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이라는 질환이 있다. 매일매일 동화 속을 보게 되는 신기하면서도 슬픈 증후군이다. 내가 그 증후군에 걸린 게 분명하다. 아니라면 왜 아무 것도 아닌 저 여자와 있는 모든 순간이 동화가 되는 걸까?"

김주원의 이 독백을 곰곰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김주원'은 환상이지만, '주원앓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 오·감·만·족 O₂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news.donga.com/O2)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