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 리포트]디지털 민주주의? ‘그들만의 권력’ 앞에 美시민들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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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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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상 중간층 실종-소수 블로거 득세 비민주성 부각
9·11후 테러예방 명목 감청 늘어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발달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며 민주적 발전에 기여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 학계에서는 IT가 프라이버시 침해 등 민주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부작용도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에서 프라이버시 및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킨 전신 투시 보안 검색기.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발달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며 민주적 발전에 기여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 학계에서는 IT가 프라이버시 침해 등 민주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부작용도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에서 프라이버시 및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킨 전신 투시 보안 검색기. 동아일보 자료 사진
88만 명.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통령선거일 당시 민주당 홈페이지에 하루 동안 몰려든 누리꾼의 수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16개 시도 순회 경선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는 등 ‘사이버 선거’의 신기원을 이루며 이겼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두고 ‘아날로그(한나라당)에 대한 디지털(민주당)의 승리’라고도 표현했다. 당시 민주당을 담당했던 기자가 정보기술(IT)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88만 명’을 과거 선거처럼 조직적으로 동원하려면 수백억, 수천억 원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 등 IT의 발달은 이처럼 조직과 돈 없이도 유권자의 정치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분명 일조했다. 그러나 빛이 눈부시면 그 그림자도 짙은 법. IT의 발달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긍적적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최근 들어 IT가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약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 정치사회적 부작용을 어떻게 최소화하고 예방할 것인가의 문제가 관련학계 연구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자는 지난 1년간 ‘IT와 민주주의’란 주제로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연수하면서 이 같은 ‘디지털 민주주의 그림자’에 대한 미국 사회의 고민을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며 살펴봤다.

○ 그들만의 디지털 민주주의?

“인터넷은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고,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를 더욱 확장시킨다.”

미국의 사회과학자 모스코의 주장이다. IT 기술이 사회발전을 꾸준히 이끌 것이란 기술결정론적 시각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조지타운대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매슈 힌드먼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의 저서 ‘디지털 민주주의의 신화’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힌드먼 교수는 “인터넷은 정치에서의 독점 현상을 제거하지 못한다. 단지 정치적 정보를 생산하는 독점에서 여과(filtering)하는 독점으로 이동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IT의 발달 덕분에 수많은 누리꾼(유권자)들이 정치 관련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마음껏 양산할 수 있지만 결국 인터넷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몇몇 독점적 포털 사이트나 인기 블로그라는 것이다. IT가 오프라인 세상의 비(非)민주적인 정치 독점과 위계질서를 해소해주는 것 같지만 사이버공간에서도 다시 비민주적 위계질서가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인기 1위 정치 블로그가 관련 트래픽의 10%를 차지하고 1∼5위가 28%, 1∼10위가 거의 절반인 48%를 장악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흔히 ‘1인 미디어’로 불리는 블로그도 결국 ‘그들만의 민주주의’로 변모해간다는 의미이다. 힌드먼 교수는 “인터넷은 기존의 정치적 불평등 일부를 해소해 줬지만 이처럼 새로운 불평등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사이버공간도 비슷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소수의 인터넷 댓글 독점 현상이 대표적이다. 코리안클릭이 2008년 8월 댓글이 200개 이상 달린 포털 뉴스 841개를 조사한 결과 상위 5%의 참여자가 전체 댓글의 44.2%를 점유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 점점 침해받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컴퓨터업계에 종사하는 윌리엄 로저 씨(45)는 5월 말 마이애미행 비행기를 타러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버지니아 주 댈러스 공항에 갔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 그는 평소처럼 비행기 출발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지만 갑자기 ‘보안 강화’ 지침이 내려지면서 수속 시간이 길어졌고 결국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로저 씨는 “3박 4일로 예정했던 크루즈여행을 송두리째 망치고 말았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보안’ 이름 앞에서는 개인의 권리는 무력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9·11 직후 제정된 애국법(패트리엇 법)에 따르면 테러에 대한 사전예방 차원이란 명목으로 개인 및 단체에 대한 감청과 영장 없는 가택수색도 크게 늘었다. IT의 발달은 이런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최근 미국 일부 주(州)의 법원과 공항에서 도입한 ‘전신투시 보안검색기’도 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프라이버시 문제 전문가인 해리엇 피어슨 조지타운대 교수는 “정부는 보안을 이유로 고가의 첨단 IT 장비를 이용해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 그에 따른 프라이버시의 침해는 그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조차 어렵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IT의 발달이 프라이버시 문제에서 ‘정부와 개인의 세력 불균형’을 더욱 심화하고, 이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협하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피어슨 교수는 덧붙였다.

송경재 경희대 교수는 “(한국보다) 프라이버시 보호 규제가 발전한 미국에서도 최근에야 몇몇 주 정부 차원에서 ‘인터넷 프라이버시’ 법규를 제정하기 시작했다”며 “한국도 ‘개인 정보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정보 통제권의 원칙부터 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 IT의 현실-위력 바로 알고 대처해야

“‘가상현실 사람들(Virtual Reality People)’이란 표현이 있다. 예를 들면 가상현실의 사이버공간에서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하는 사람들이다. 땀도 안 나고 모기도 안 물고 얼마나 좋은가.”

조지타운대의 ‘IT 기술의 근본요소들’이란 강의에서 들은 내용이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급증하면서 미국의 낚시 인구 및 국립공원 방문객 수가 급감했다는 조사보고서도 나와 있다. 인터넷 등 IT는 이처럼 일상인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그래서 그 문제점에 대응하는 것도 더욱 어렵다고 미국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4월 21일 워싱턴 시내의 한 클럽에서 열린 ‘디지털 파워와 그 불만요소들’이란 세미나에서는 ‘IT의 발달이 사생활과 표현의 자유 간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사이버 공간의 문제점들을 낡은 법으로 규제하는 데 한계가 너무 많다’ ‘인터넷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건전한 시민들이 길을 잃고 있다’ 등 다양한 우려가 쏟아졌다. 한 참석자는 “디지털의 다양한 폐해 탓에 ‘디지털 러다이트(산업혁명 당시의 기계파괴 운동처럼 디지털을 거부하는 운동)’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고 소개했다. 물론 ‘진보와 자유 재단’ 같은 진보적 시민단체의 관계자들은 “IT의 발달이 민주사회 발달에 미친 긍정적 요소를 부인하는 것이냐”며 낙관론을 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토론은 뚜렷한 결론 없이 끝났다.

이에 앞서 2월 21일 미국의 유명한 언론 박물관인 ‘뉴지엄’에서 열린 ‘저널리즘의 위기: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나’의 세미나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미국 연방공정거래위원회(FTC)의 수전 데샌티 국장은 “구글 같은 포털로 뉴스를 보는 젊은이가 많아지면서 미국 언론이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인들에 대해 건전한 시민들이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저널리즘의 역사적 기능은 반드시 생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데샌티 국장은 언론기관에 대한 면세 또는 재정적 지원 등이 검토되고 있다고 밝혔지만 진보적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언론)시장에 정부가 왜 나서려 하느냐”고 반박하면서 세미나는 해법 없이 공전을 거듭하기만 했다.




한국 ‘개똥녀 사건’ 美서 ‘사이버 테러’ 단골 메뉴로

2005년 서울 지하철에서 20대 여성이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내렸다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그 장면이 포털사이트 등에 퍼지면서 일종의 ‘사이버 테러’를 당한 사건이다.

1년간의 연수 기간에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디지털 사회와 프라이버시’를 주제로 한 강의를 들을 때마다 이 사례가 어김없이 언급됐다. 다른 대학의 비슷한 강의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워싱턴주립대 경영대학원인 포스터 스쿨에서 ‘웹 2.0과 뉴 이코노미’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용 탄 교수도 개똥녀 사건을 인터넷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대표적 사례로 소개했다. 지난해 이 강의를 들은 한국인 김모 씨(37)는 “한국에서는 거의 잊혀진 이 사건이 미국인들의 관심을 끄는 게 신기했다”며 “사건의 여파로 대학을 자퇴한 것으로 알려진 그 여성의 사생활이 이렇게 침해돼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학생들 간 토론이 뜨거웠다”고 말했다.

해리엇 피어슨 조지타운대 교수는 “이 사건은 정보기술(IT)의 발달이 시민들의 사회적 고발을 활성화하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개인들 간의 프라이버시 침해도 얼마나 심각하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 여성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장면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가 없었거나 △또 그것을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할 수 없었다면 이런 프라이버시 침해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이 사건은 개인이 다른 개인을 감시하는 ‘개인 간 경계(individual surveillance)’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또 IT의 발달로 자생해온 이른바 ‘사이버 자경단원(cyber vigilante)’의 사회적 고발 수준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등에 포괄적인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IT학계에서도 최근 들어 휴대전화를 분실한 한 시민이 이를 습득하고도 제때 돌려주지 않은 다른 시민을 인터넷상에서 맹공격해 ‘공공의 적(敵)’을 만든 사례 등 미국판 개똥녀 사건들이 자주 보고되고 있다.

《이 기사는 지난 1년간 SK그룹과 한국기자협회가 공동 운영하는 ‘SK펠로’ 프로그램의 지원으로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연수한 경제부 부형권 차장의 보고서입니다.》

워싱턴 버지니아=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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