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정주현] '하얀 리본'…억압 속에 가려진 위선, 그리고 폭력

  • Array
  • 입력 2010년 7월 12일 13시 17분


코멘트
한 무리의 아이들이 "늦게 오는 사람은 바보!"라 소리치며 달려 나간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달리지 않고 일렬로 선 채 자박자박 걷기를 계속한다. 아이들의 뒷모습 위로 한 노인이 회고한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클라라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대형을 흩트리지 않고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짙게 감돌던 1913년.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마을의 의사가 집 앞 공터에 묶여진 끈에 걸려 낙마하고, 한 소작농의 어머니는 제재소에서 실족사 한다. 남작의 아들이 사라졌다 발견되는가 하면, 남작 영지의 헛간에는 불이 난다. 관리인의 갓난아기는 잠들어 있던 방 창문을 누군가 열어놓아 감기에 심하게 걸리고, 마을 산파의 장애아 아들은 한쪽 눈이 도려내어지는 끔찍한 사건까지 일어난다.

▶ 고요한 마을에 터진 의문의 사건들

시계추처럼 규칙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던 마을에 혼란이 일기 시작한다. 아들의 사고로 격앙된 남작은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범죄를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연설을 하고, 이를 계기로 마을은 불신과 반목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진다. 시내에서 경찰까지 동원되지만, 범인은 알 길이 없다.

처음에 사건은 마을 사람들 중 2/3를 고용하고 있는 남작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의 짓으로 보였다. 그러나 곧 남작의 양배추 밭을 망친 사람과 아들을 납치한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오히려 사건들은 제각각 의미 없이 동떨어진 일들로 여겨진다. 알 수 없는 불안과 불신은 좀처럼 풀리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추수감사 축제를 하고 교회에 가며 일상을 계속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 사건들 뒤에 공통적으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눈치 챈 사람이 있었다. 바로 외지에서 부임해 온 학교 선생님, 즉 이 영화의 화자였다.

이 영화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숨 막힐 듯한 억압이다. 여성들은 하나같이 정갈하게 쪽진 머리에 목 끝까지 단추를 야물게 채우고, 얼굴과 손 외에는 신체의 어떠한 부분도 노출시키지 않는 긴 드레스를 입고 있다. 남작과 소작농의 주종관계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위계도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하다. 큰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작 집안의 모든 유모는 가차 없이 해고를 당하고 불경한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세차게 뺨을 얻어맞는 것이, 바로 이들의 삶이다.

독특한 이 영화의 미장센 역시 청교도적인 마을의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인물들의 배치구도나 전체적인 마을의 풍경은 마치 캔버스 위에 자를 대고 그린 듯 치밀하고 물샐 틈이 없어 보인다. 정적인 카메라의 움직임과 차가운 흑백의 영상 또한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수학적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

▶ 동심에 비친 어른들의 위선

그리고 그 억압의 가장 상징적인 표본은 바로 하얀 리본이다. 목사의 아이들은 단지 저녁 식사에 늦었다는 이유로 혹독한 체벌을 받고, 머리와 팔에 '순수'를 의미하는 하얀 리본을 달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두 번의 계절이 지난 후 해가 바뀌어서야 비로소 이 하얀 리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비'를 얻게 된다. '순수'와 '도덕'이라는 미명하에, 어른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아이들에게 가혹한 복종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 억압 이면에는 은밀하게 행해지는 끔찍한 위선이 있었다. 어느 새 훌쩍 커버린 딸에게 의사는 나이를 물어보더니, 어느 날밤 딸을 은밀히 불러낸다. 어린 아들이 잠에서 깨어 누나를 찾아오자, 의사는 아이의 시선을 등진 채 슬그머니 바지를 추스른다. 그 뒤로 보이는 것은 딸의 걷힌 치마와 길게 드러난 다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을지라도,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마을의 목사는 아들 마르틴을 추궁하는 과정에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저 '신이 주신 신체의 일부를 파괴하는' 자위행위를 한 것으로 거세게 몰아세운다. 어쩌면 아이들의 죄를 눈치 챘으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 눈을 감는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도덕적 외피를 입고 행해지는 이러한 위선과 폭력은 서서히, 그리고 구조적으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잠식한다. 이는 눈에 드러나지 않기에 치유할 수 없고, 집단적이기에 정화되지 않으며, 정신 속 깊이 침투하기에 심각한 내상을 남긴다. 우리 몸에 남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머릿속에 남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짐을, 이 영화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의사가 내연의 관계에 있던 산파를 매몰차게 내치던 장면은 그 어떤 폭력적인 장면보다 더욱 충격적이다. 의사는 그 어떠한 신체적 폭력도 취하지 않지만, 그가 산파에게 내던지는 치명적이고 모욕적인 말들은 보고만 있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혼란과 고통에 빠진 산파는 급기야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의사의 치부를 드러내며 공격하고, 이들이 지켜왔던 둘 사이의 견고하고 고요한 위선은 순식간에 파멸에 이른다.

타지 출신인 학교 선생님은 이러한 집단적인 광기를 눈치 챈다. 그는 말한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은, 어쩌면 이 나라 전체에서 벌어졌던 일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세계 전쟁을 두 차례나 치른 독일의 집단적 광기를, 그는 이 마을을 통해 먼저 목격한 것이다. 한 마을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듯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렇게 뜬금없는 듯, 그러나 너무도 정교하게 역사적 맥락으로 확장된다.

▶ 집단의 광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아이러니컬한 것은 바로 그 엄격한 도덕적 규율과 복종을 강요받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반항함에 있어,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어른들의 위선과 폭력을 단죄하려 하고, 그 방법으로 은밀하고 조직적인 폭력을 선택한다. 또한 겉보기에는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처럼 행동하며 어른들의 위선을 그대로 복제한다. 미하일 하네케 감독은 일방적으로 억압된 아이들의 비뚤어진 성장을 통해, 관객들에게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의 기원에 대해 들여다보도록 한다.

이 작품은 지난 해 칸 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비평가들의 평점과 심사위원들의 평가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에서 오는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 '피아니스트' '퍼니게임' 등 전작으로 늘 논란을 일으켰던 감독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수상의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논란적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이 영화를 통해 '거장'이라는 단어로 바뀌게 되었다.

가볍고 자극적인 영화의 홍수 속에 고집스럽게 개인과 사회에 대해 논하는 영화. 넘쳐나는 총 천연색 3D 영상물 속에 오롯이 서 있는 한편의 흑백영화. 흥행의 필수 요건이 된 빠르고 스펙터클 한 전개 대신 느릿느릿 이야기를 건네는 영화. 감독의 고집만큼이나, 여운은 길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