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국적:한국-조국:북한-모국:일본…정대세의 ‘빅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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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4일 11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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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오전(한국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에서 열린 2010남아공월드컵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에서 북한 정대세 경기가 시작되기 앞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

'0-7'

21일 열린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북한-포르투갈전이 끝나던 순간, 전광판에 뜬 점수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그라운드를 적시는 빗속에서 북한 대표팀의 에이스 정대세는 고개를 숙였다.

'인민 루니'라는 별명처럼 평소 당당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응원한 분들께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경기장을 떠났다.

앞서 16일 북한-브라질전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정대세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북한 국가가 울릴 때 펑펑 눈물을 흘린 장면은 각국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그는 '축구 1인자'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과감한 공격을 선보이며 축구 팬의 눈을 사로잡았다. 팀은 1-2로 분패했지만 정대세는 이번 월드컵 이후 유럽 진출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포르투갈에 0-7로 대패하고 북한의 16강 진출이 좌절되면서 '북한 박지성'을 예고했던 정대세의 꿈은 조금 멀어진 듯 하다. 그래도 코트디부아르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가 남아 있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원정 첫 16강 진출의 꿈을 이뤄내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비록 북한은 그 달콤한 열매를 맛보지 못했지만 더 큰 세상을 향한 '빅 월드' 정대세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정대세 블로그
출처=정대세 블로그

▶南 국적-北 대표-日 거주…'멜팅 팟'

재일교포 3세인 정대세는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하지만 경북 출신의 아버지를 따라서 한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축구 선수로서는 북한 대표팀 소속으로 활동한다. 국적은 한국이고 그의 모국은 일본, 조국은 북한인 셈이다.

정대세는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니면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고 자연스레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게 됐다. 하지만 북한과 수교를 맺지 않은 일본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하려면 한국 국적을 취득해 외국인 신분이 되거나 일본인으로 귀화해야만 했다.

그는 이충성(리 다다나리), 추성훈(아키야마 요시히로) 등 젊은 재일교포 출신 스포츠 스타들이 일본인으로 귀화해 편하게 활동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한국 국적과 북한 대표팀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할 때 그의 말투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 태어나 축구 선수로 활동해온 정대세에겐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편한 말이다. 이 같은 출생과 성장 배경을 통해 정대세는 국적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인 '멜팅팟' 축구 선수로 활약할 수 있게 됐다.

출처=정대세 블로그 ☞ 사진 더 보기
출처=정대세 블로그 ☞ 사진 더 보기

그는 이번 월드컵에서 축구 강국 브라질, 포르투갈의 스타 선수들과 얘기하고 싶어 배웠다며 유창한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등 자유분방한 개성을 마음껏 드러냈다. 또 나이지리아와 평가전을 마친 뒤 한국 대표팀에 조언을 하는 등 자기표현에 적극적인 한국이나 일본 젊은이들과도 다를 바 없다.

평소 강렬한 무늬가 돋보이는 티셔츠와 청바지 등 힙합 스타일을 즐겨 입는 점도 독특하다. 북한에서는 종교가 금기사항이지만 정대세는 힙합 가수처럼 금속제 십자가 목걸이를 자주 착용하고 사진을 촬영한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려는 듯, 노출 사진도 자주 공개한다. 자서전이나 자신의 블로그 대문 사진에도 근육질의 상반신을 드러낸 모습을 넣었다.

정대세 블로그  ☞ 사진 더 보기
정대세 블로그 ☞ 사진 더 보기

▶블로그로 팬관리 하는 '빅 월드'

정대세는 지난달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 블로그를 개설해 팬들과 소통에 나섰다. 블로그 제목은 자신의 이름 대세(大世)를 영어로 표현한 '빅 월드'(Big World)다.

그는 블로그를 만든 이유에 대해 '월드컵 출전으로 한 달가량 일본을 떠나게 돼 근황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며 팬 서비스 차원임을 밝혔다.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그리스전 등 평가전 후기나 남아공 현지 숙소 내부 사진, 북한 대표팀 식사 사진, 이동 중에 촬영한 사진 등을 직접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남아공에 도착해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나 익살스런 '셀카'도 과감하게 올렸다. 일본 팬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자신의 이모티콘 '(`З´)/'도 블로그에 즐겨 사용한다.

북한 감독이 기자회견에서 '한국'이란 단어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정대세는 블로그에 '남조선' 대신 '한국'(韓國)이라 적기도 했다. 북한에선 '한국'이란 명칭이 금지된 표기이지만 블로그를 읽는 팬들을 고려해 일본 방식대로 쓰는 것이다.

일본이 모국인 그는 일본 대표팀이 카메룬전에서 승리한 뒤 블로그에 '무척 기쁘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한국에 이어 아시아 2승째인가'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시물이 일반적인 북한 선수라면 당장 징계를 받을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북한으로선 그가 재일교포인데다 국적도 한국이기 때문에 기량이 뛰어난 스타 선수를 계속 붙잡기 위해 대우를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스몰 월드'다. 하지만 북한 축구 선수 정대세는 이름처럼 '빅 월드'를 꿈꾸는 듯 하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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