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미국(上)-‘잊혀진 전쟁’ 노병들의 분노

동아일보 입력 2010-02-08 03:00수정 2010-06-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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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교과서엔 다섯 문단만 수록… 희생을 너무 쉽게 잊어”
“참전했다 돌아왔더니
한국에 무슨 일 있냐 되물어
비기려고 희생했냐 하는데
자유 지켜낸 우리의 승리”
6·25전쟁은 많은 미국인에게 잊혀졌다. 미국 참전자는 연인원 150만 명으로 이 중 사망자만 3만6000여 명이다. 많은 젊은이를 희생했건만 미국인들은 좀처럼 6·25전쟁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6·25전쟁은 ‘역사의 고아가 됐다(orphaned by history)’는 표현도 생겨났다.

낯선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참전용사들은 6·25전쟁을 어떻게 기억할까. 1월 31일부터 2월 3일까지 수도 워싱턴과 메릴랜드, 버지니아, 인디애나 주의 참전용사 10여 명을 만났다.

○ “잊혀진 게 아니다”

워런 위드한 대령은 1월 말 전우들에게 e메일을 돌렸다. 공영방송 PBS에 출연한 역사학자들이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을 처음 실행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20세기의 중대 사건’이라고 평가한 대목을 전하면서 “한국전쟁이 의미가 있었느냐고? 물론이다”라고 썼다. 그만큼 6·25전쟁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목말라 있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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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수류탄에 팔다리 잃어”
미국 메릴랜드 주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한 빌 웨버 예비역 육군 대령. 그는 육군 187공수부대 소속 대위로 6·25전쟁에 참전해 강원도 원주에서 적이 던진 수류탄에 오른쪽 팔과 다리(무릎 아래)를 잃었다.
육군 187공수부대를 이끌던 빌 웨버 대위는 1951년 초 강원 원주에서 북한군이 던진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밑과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었다. 그는 “역사교과서에 한국전쟁이 너무 안 다뤄진다. 사람들이 모를 수밖에 없다”며 가슴을 쳤다. 그는 2시간의 인터뷰 도중 두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다.

웨버 대위는 6·25전쟁이 교과서에서 다섯 문단밖에 안 다뤄지는 ‘다섯 문단 전쟁(5-paragraph war)’으로 불린다고 자조했다. 그 다섯 문단도 트루먼 행정부와 맥아더 사령부 간의 갈등, 정전협상 등을 다룰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6·25전쟁에 대한 미국 내의 냉정한 인식이었다. 행정병이던 리처드 로빈슨 육군 원사는 “휴전 후 몇 년 뒤에도 한국전쟁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참전용사회 인디애나 주 지회장인 타인 마틴 씨는 “내가 한국전쟁에 갔다 왔더니 ‘한국에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어본 대학생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 “무승부가 아니었다”

노병들은 “겨우 비기려고 그렇게 죽었느냐(to die for a tie)”라는 일각의 평가를 경멸했다. 무공훈장(Purple Hearts)을 3개나 받은 스탠 벤더 해병대 병장은 “무슨 소리냐.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금방 공산화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웨버 대위는 “무조건 이겼다고 말하지는 않겠다”면서도 “하지만 오늘의 한국이 내가 본 1950년대에 머물렀다면 난 실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쩍 성장한 한국의 오늘이 6·25전쟁의 의미를 재조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몬태나 주 출신의 에드 보처트 대위는 이번에 인터뷰한 참전용사 가운데 유일한 대학 졸업자. 1949년 입학한 스탠퍼드대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하면서 해병 장교 프로그램에 가입했다. 그는 “역사학도로서 나는 자유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고, 해병 장교로서 자부심과 명예를 갈망했다. 한국과 미국은 승리했다”고 말했다.

○ 각양각색의 전쟁 체험기

벤더 병장은 서울 수복 직후 친한 친구가 눈앞에서 죽었을 때 오열했고, 처음으로 적군을 쏴 죽였을 때 구토를 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적군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만 20세 때 겪은 일이었다.

멜빈 버틀러 육군 상병은 적군이 쏜 총에 등을 맞아 전쟁포로가 됐고 9일 동안 끌려 다니다가 잠시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비탈을 굴렀고, 논바닥을 기었다”고 말했다.

웨버 대위는 평양 북쪽의 숙천에서 공중 투하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한국의 자유 회복? 그것도 전쟁터에 안 가본 사람의 소리가 아닌가 싶다. 내 부하가 총에 맞으면 눈이 뒤집혔고, 내가 살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했다.

라디오 수리공이었던 월트 크로닌 육군 병장은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자란 만큼 큰 부담은 없었다”고 말했다.

로빈슨 원사는 “대구에서 타이핑을 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손을 번쩍 들었다. 최전방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참전 사실을 서로 몰랐던 사촌동생과 부대에서 조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워싱턴·포트웨인(인디애나 주)=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 한미軍전우애 보여준 ‘58년 전 피묻은 태극기’ ▼
“부상 국군, 파편 빼주자 건네”
슬로트씨, 주미대사관에 기증


미국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에는 이달 초 오래된 피 묻은 태극기 하나가 걸렸다. 텍사스 주에 사는 로버트 슬로트 씨(81·사진)가 지난해 말 “6·25전쟁 때부터 피 묻은 태극기를 보관해 왔다”며 기증한 것이다.

슬로트 씨는 전쟁 당시 미 육군 73전차대대 C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싸웠다. 청력이 약해진 그는 2일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한 국군 장병의 조국사랑과 한미 양국 군인의 뜨거운 전우애를 전해줬다.

슬로트 소대장은 1952년 말 강원 철원지구에서 탱크로 이동하던 중 길가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던 한국군 병사를 발견했다. 이름도 계급도 기억할 수 없는 이 병사는 동료의 부축을 받고 전차에 올라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때 이 병사는 가슴 속에서 붉은 피로 물든 태극기를 꺼내 내밀었다. 슬로트 씨는 “그가 한국말로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태극기를 손에 쥔 그의 환한 미소를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지금껏 받은 ‘생큐’라는 말(표정)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고 회상했다. 둘 사이에 정상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같은 군인으로서 많은 걸 교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군 병사는 옆구리에 포탄 파편이 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뒤 슬로트 소대장은 뽑아낸 파편을 보여줬고,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슬로트 소대장은 붕대를 감아주면서 이후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전우에게 “당신은 최고의 군인”이라고 말해줬다.

이후 슬로트 씨는 이 태극기를 간직했고 한국을 떠나 미국과 유럽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액자에 넣어 보관해 왔다. 그는 “내 자녀들은 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하는 그 국기를 보며 자랐다. 한 나라의 국기가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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