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조심스러운 비관

  • 입력 2009년 6월 10일 19시 52분


몇 년 전 ‘20년 좌파 집권론’이 나돌았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열린우리당이 국회 의석 과반을 차지해 기세를 올릴 때였다. 일부 학자와 경제인들은 방송을 좌파가 장악했고 전교조 교육에 물든 세대가 늘어나면서 노 정권 다음에도 10년은 비슷한 흐름이 더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하던 2005년 작가이자 평론가인 복거일 씨는 ‘조심스러운 낙관’이란 담론(談論)을 제기했다. 그는 당시 현실을 “정권과 권력을 나누어 가졌거나,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에 적대적인 소수를 빼면 신명 날 일이 거의 없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실험이 남긴 교훈으로 이념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자유주의가 더 힘을 얻고 있다면서 “이 땅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지금의 어둠은 섣달의 그것”이라고 낙관했다. 결국 좌파 세상은 20년까지 가지 못하고 1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정권교체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글로벌 위기를 좌파정권 3기에서 맞았다면 우리 경제의 고통은 훨씬 컸을 것이다. 우방인 미국 일본과의 관계가 호전됐고 북한 정권에 군자금을 갖다 바치며 ‘거짓 평화’를 구걸하는 굴욕도 끝났다. 지금 한국이 국제사회의 외톨이로 전락하지 않고 경제적 충격이 비교적 적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인 친근감이 외국인들의 투자심리에 큰 도움이 됐다고 이승철 전경련 전무는 분석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정부와 한나라당의 비겁하고 무기력하고 분열적인 행태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정권교체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많은 국민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준다. 안타깝게도 제1야당이 불법과 폭력을 밥 먹듯 하는 과격세력과 손을 잡는 현실에서 대안도 마땅찮다. 나라의 운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만난 기업인은 “출자총액제한제도나 징벌적 부동산 세금처럼 이미 없어졌어야 할 것 외에 확 와 닿는 규제완화가 몇 개냐 되느냐”고 반문했다. 한 경제전문가는 “현 정부조차 기득권세력 눈치 보느라 서비스산업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면 한국은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다. 경제계가 느끼는 현실이 이런데도 ‘대기업과 부자를 위한 정부’라며 계급적 갈등을 선동하는 일각의 공세를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정부여당 사람은 찾기 어렵다.

과거 권력의 단맛을 누리고 사실 왜곡도 서슴지 않다가 갑자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장하는 세력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지난 시절 말한 것, 행동한 것을 있는 그대로만 드러내도 국민이 많은 것을 느낄 텐데 팔짱만 끼고 있다. 반정부 투쟁을 독려하는 DJ에게 “북한에 바친 뇌물로 우리 안보를 위협했고 대규모 부정축재 의혹도 받는 당신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는 어떤 것인가”라고 추궁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좌파적 가치라도 약자에 대한 배려 등 긍정적 측면은 받아들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와 시장(市場)을 흔들고 ‘빈곤화와 예속의 길’을 부추기는 세력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고 우왕좌왕한다면 돌아오는 것은 경멸뿐이다.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면서 자리 챙기기와 적전(敵前)분열만 일삼는 정권을 지켜보면서 ‘조심스러운 낙관’을 접고 ‘조심스러운 비관’에 빠지는 국민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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