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조동호]다급해진 北김정일, 시간은 우리편이다

  • 입력 2009년 5월 12일 02시 58분


시간은 늘 북한의 편이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89년 남북경협을 시작한 이래 줄곧 그랬다. 5년 임기의 남한 대통령과 종신제인 북한 김정일의 협상은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분단국가의 대통령으로서 남북관계 개선을 결코 외면할 순 없었고 임기 말은 항상 빨리 다가왔다. 초조해지기 마련이었다. 예컨대 이산가족 문제를 진전시키지 못한 대통령, 남북경협을 발전시키지 못한 대통령은 아무리 다른 업적이 많아도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조급한 남한 대통령을 상대로 김정일은 버티기만 하면 됐다.

결국 그동안 남한 대통령의 선택은 두 가지였을 뿐이다. 나쁜 놈 하고 아예 상대를 하지 않거나 치사한 놈 하면서도 할 수 없이 원하는 것을 주거나. 어느 쪽을 택하든 정치적으로는 힘들었다. 전자는 분단고착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후자는 퍼주기 비판에 마주쳐야 했다. 무엇을 택하든 보수와 진보 중 어느 한 진영은 반발하기 마련이었다. 남남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김정일은 이런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가만 놔둬도 남한 내부에서 스스로 치고받고 싸우고 결국 임기 전엔 먼저 손 내밀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지금 정권이 안 주면 다음 정권은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김정일은 느긋하게 즐기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시간은 임기가 없는 그의 편이었으므로.

“개성공단 폐쇄” 위협만 되풀이

그러나 사정이 변했다. 영생을 살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한의 임기도 건강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차라리 임기라면 언제까지인지 알고 준비라도 할 수 있지만 한번 쓰러지고 나면 두 번째 쇼크가 언제 올지 모른다. 이제 다급해진 건 김정일이다. 게다가 모든 상황이 여의치 않다. 후계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속마음이야 있겠지만 그게 누구든 확고한 권력기반을 만들어 주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어느 날 자신이 죽어도 우리 식 사회주의는 영원무궁해야 할 텐데, 그래야 그의 사후도 편안할 텐데 체제 보장은 아직 막막하다.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기 위해 올해엔 문패라도 달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사정은 답답할 뿐이다. 말만 계획경제일 뿐 배급조차 제대로 못 주는 형편이다. 주민은 일거리 없는 공장에 나가는 대신 시장에서 알아서 벌어먹는다. 그래서 경제가 호전되는 듯이 보이지만 오히려 경제시스템은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흉흉한 민심이 감지되고 당국의 명령은 먹히지 않는다. 우선은 내부부터 추스르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를 살리고 이완된 민심을 하나로 잡는 일이다. 할 수 없이 김정일은 아픈 몸을 이끌고 예년의 3배나 되는 현지지도를 강행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말로 지시해서 풀릴 문제라면 진작 풀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러 수척한 사진을 주민에게 보여 동정심을 자극하는 방법까지 동원할 만큼 다급한 실정이다.

최근 개성공단에 대한 북한의 자세는 이런 김정일의 초조함을 보여준다. 지난달 북한이 개성공단 특혜를 재검토하겠다고 하자 혹자는 북한이 돈을 더 뜯어내려는 술책이라고 분석한다. 그게 아니라 공단 폐쇄의 책임을 남측에 전가하려는 수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아닐 가능성이 크다. 임금을 2배로 올리고 토지사용료를 앞당겨 받아도 기껏해야 5000만 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무역액이 50억 달러는 되는 나라이다.

자존심 강한 북한이 이 정도 더 얻자고 ‘역도(逆徒) 이명박 정부’에 경색 국면에서 먼저 대화를 제의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만약 폐쇄할 의도였다면 이미 했을 것이다. 올해 들어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무력 사용 위협까지 하면서도 북한은 개성공단만은 그대로 진행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긴장을 조성할 목적이라면 기존의 개성공단부터 중단시키는 방법이 순서상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성공단은 민간사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당국이 깊이 개입된 사업이라는 점에서 북한이 가장 우선적으로 중단시켰어야 할 사업이다.

철저한 원칙보다 유연한 접근을

결국 스스로 초조해진 김정일의 대화 제의이고 도와달라는 제스처로 읽힌다. 특혜 재조정은 트집일 뿐이다. 속내는 개성공단의 지속은 물론 개성을 넘어서는 대형 경협과 지원을 원하는 것이다. 그저 돈을 더 얻거나 폐쇄할 요량이었으면 일방적으로 통보했지 2차 접촉까지 요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시간은 우리의 편으로 넘어오고 있다. 남북관계의 근본 틀 자체가 바뀌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방법은 현명하지 못하다. 제대로 이 호기를 활용해야 하고 우리의 대북 인식 패러다임도 변해야 한다. 이제는 그나마 운영되던 북한이 아니라 ‘작동이 멈추기 시작한 북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관리의 필요성이 커졌다. ‘원칙엔 철저, 접근엔 유연’이라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방점이 유연한 접근 쪽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