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전직 대통령의 위험한 게임

  • 입력 2009년 4월 20일 02시 57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 청와대 기록물 반납을 둘러싸고 이명박(MB) 청와대와 신경전을 벌이면서 MB에게 보내는 편지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는 이 편지에서 “이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예우(禮遇)하는 문화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습니다’라고 거듭 말했다”면서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했으나 은근히 기대도 했다”고 토로했다.

한국 현대사는 불행하게도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가 전통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후 망명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변고를 당해 생전에 ‘전직’을 해보지도 못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임자를 백담사에 유배 보냈고, 김영삼 대통령 때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이 교도소에 갔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계는 정치 역정에서 서로 고통을 주고받거나, 명패를 던지거나 독설을 교환하는, 대체로 껄끄러운 사이가 됐다.

이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예우’를 거론한 것도 전직을 예우하지 않는 불행한 전통을 자기 대에서 끝내려는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믿고 싶다. 1년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MB 청와대와 봉하마을의 감정 파열은 작년 4∼6월 이지원(e知園·청와대 내부 문서통합관리시스템) 기록물 반납을 둘러싼 승강이로부터 시작됐다.

정권 자극한 10·4 선언 1돌 연설

노무현 청와대는 이지원 기록물을 싹쓸이 복사해 가면서 37만여 건과 그 목록까지 ‘비공개’로 지정해 국가기록원에 넘겨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동의하지 않으면 15∼30년 동안 열람할 수 없도록 대못질을 했다. MB 청와대 컴퓨터에는 깡통파일만 남아 대통령실이 모든 작업을 새로 시작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언급해 최악의 상태까지는 안 갔다.

양측의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은 작년 10월 1일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연설을 하면서다. 그는 이 연설에서 “회사 최고경영자는 전임 사장이 계약하면 후임은 이행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도가 난다. 그런데 국가의 최고경영자는 안 그래도 되는지 미처 몰랐다”며 이 대통령을 바로 겨누었다. 전직 대통령의 연설은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구석구석 북한의 입맛에 맞추어 대한민국 체제를 흔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북한의 처지에서 생각해봅시다”라고 말했다. 북핵을 제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와 노력을 재독 친북학자 송두율류의 ‘내재적 접근법’에 입각해 무시하는 발언이다. 그는 “북한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큰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신뢰를 훼손하는 부담을 무릅쓰고 작계(작전계획) 5029를 강행할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이념적 대결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이고 남북대화의 걸림돌”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을 강조하고 동맹을 강조하고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 이런 것은 실용주의인가요 이념주의인가요”라고 비아냥거림 투로 반문했다.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에까지 시비를 거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현 정권의 기류에 밝은 한 인사는 “한마디로 친북좌파는 다 모이라”라고 선동한 연설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청와대 이지원을 봉하마을에 옮겨놓고 이른바 ‘민주주의 2.0’을 가동하는 의도는 결국 386과 친북좌파들을 끌어 모아 현실정치에 개입하려는 것 아니었겠나”라며 “촛불시위에 시달린 집권 측으로서 좌파세력의 결집을 다시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말과 글을 자제하고 자중했더라면 전직 예우 분위기가 조금은 더 이어졌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도덕적으로 당당하고 강해보였지만 박연차 강금원 씨만 수사하면 맥없이 허물어지는 부실 구조였다. 깨끗하지도 못하면서 큰소리만 쳤던 셈이다.

‘예우 받기’ 본인 하기 달렸다

노 전 대통령의 사법적 운명은 원론적으로 말하면 검찰이 확보한 증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국민정서법도 중요한 요소다. 그는 변호사답게 법리와 증거 논쟁을 벌이면서도 동정론을 불러일으키려는 전략을 드러낸다.

사법처리 결과와 관계없이 전직 대통령의 섣부른 정치 개입은 참담한 실패를 부르고 말았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후임자의 의지보다는 본인 하기에 달렸음을 노 전 대통령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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