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55>

  • 입력 2009년 3월 23일 13시 27분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면, 법은 또한 모든 로봇에게도 평등할까. 평등해야만 할까.

뇌를 가져가는 세 번째 살인사건이 터진 것은 글라슈트가 32강전에서 겨우 이긴 다음 날 밤이었다. 살해당한 이는 특별시연합 격투대전 웰터급 준우승자 변주민이었고, 그의 혈액에서 신종 마약의 일종인 '솔리튜드 47'(Solitude 47)이 발견되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아폴로 우주선이 달의 궤도를 돌 때, 달의 뒷면으로 숨어 지구의 관제탑과 연락이 두절되는 시간이 47분이었다. 절대 고독을 상징하던 이 단어가 '홀로 마약을 즐기는 시간'으로 변질된 것이다. 달의 뒷면을 여행한 우주인이 아니고는 어찌 그 막막한 외로움을 알랴. 그 만큼 이 약의 황홀경도 체험하지 않고는 모른다는 뜻이다.

현장에 도착한 성창수가 세 가지 특이 사항을 보고해왔다. 첫째, 피살자 변주민의 발목이 모두 절단되었다. 날렵한 푸트워크를 자랑하던 그의 두 발이 뇌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둘째, 변주민의 몸은 군데군데 출혈과 함께 피멍이 가득했다. 송곳이나 대침과 같은 예리한 흉기로 수백 차례 찔린 듯했다. 마지막으로 변주민은 아내 대용 로봇 달링 4호를 껴안은 채 숨졌다. 단순한 포옹이 아니라 변주민의 특정 부위가 달링 4호의 하복부에 깊이 박혔는데, 성창수의 보고에 따르면 변주민과 달링 4호가 엉킨 곳에서 정액이 검출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정액의 주인이 변주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웃겨! 끼운 놈 따로 있고 싼 놈 따로 있단 소린가?"

조수석의 지병식이 변주민의 자료 영상과 기록을 띄워 훑으면서 툴툴거렸다. 주문한 야식이 도착하기도 전에 긴급 출동을 나선 것이다. 느릿느릿 여유로운 성품이지만 배고픔만은 참지 못했다.

"상습적인 로봇 파손범입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달링 3호를 아홉 대나 박살냈군요. 이런 놈은 달링 1호와 2호에게도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겁니다. 게다가 마약까지 하고 덤벼들었으니 쓰레기 중에서도 쓰레깁니다. 이런 새끼들은 모조리 특별시 밖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그만 하세요. 누가 들으면, 잘 죽었다는 소리로 오해하겠습니다."

전기자동차를 운전하던 석범이 참다못해 한 마디 했다.

"꼭 잘 죽었다는 건 아닙니다만, 쌍, 이런 놈들은 정말 싫어요. 검사님은 아내 대용 로봇을 파손하는 이 녀석들이 용서가 되십니까? 왜 애꿎은 로봇은 부수고 지랄들인지, 그렇게 분을 참기 어려우면 자기 발가락이나 부러뜨려 씹든가……."

"그만!"

석범이 차를 세웠다.

뒤따라오던 차들이 '쾌속 점프'로 뛰어넘었다. 브레이크를 밟아도 충돌을 피하기 어려울 때 대형 사고를 방지하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이 기술이 선을 보인 후 교통사고 발생률이 30퍼센트나 격감했다. 가끔 철없는 청소년들이 쾌속 점프 버튼을 음악에 맞춰 눌러대며 목숨을 담보로 경주를 벌이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거, 검사님!"

병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로 한 가운데에 차를 세우는 짓은 3개월 징역형과 맞먹는 중과실이다. 운전자가 공직자인 경우에는 좌천이나 심한 경우 해직까지 감수해야 했다.

"지 형사님! ……우린 그러니까 우린 말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은 죄만 밝혀내서 잡아들이면 됩니다. 그 사람이 예전에 무슨 짓을 했던지, 물증이 없다면 억측은 금물이다 이 말입니다. 변주민이 달링 3호를 파손한 후 신고도 하지 않고 아무 곳에나 유기한 벌은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달링 4호와 몸을 섞은 건 명백하게 무죄죠. 아내 대용 로봇을 구입하는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변주민처럼 로봇과 몸을 섞기 위해 비싼 값을 치릅니다. 달링 1호와 2호에게 변주민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지 형사님도 모르고 나도 몰라요. 그리고 변주민이 달링 달링 달링 달링들에게 저지른 짓보다도 살인범이 변주민을 죽이고 뇌를 가져간 것이 훨씬 무거운 범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대뇌수사팀은 아내 대용 로봇을 파손하고 신종 마약을 칵테일로 마신 자들을 추격하는 게 아닙니다. 특별시민을 연쇄적으로 살해하는 흉악범을 체포하는 것이 목푭니다. 아시겠습니까?"

병식이 아랫입술을 덜덜덜 떨면서 답했다.

"지당하십니다. 검사님! 어서 출발부터 하세요. 교통 담당 로봇에 걸리면 괜한 봉변당하십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열 배 백 배 잘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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