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여성 공직자에게 남편은 짐인가

  • 입력 2008년 10월 28일 20시 21분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부통령 후보로 화려하게 등장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잇따른 독직(瀆職) 스캔들로 갈길 바쁜 공화당에 짐이 되고 있다. 진보성향의 미국 언론들이 공화당에 타격을 주기 위해 페일린 후보를 고의적으로 흠집 낸다는 주장도 있는 모양이다. 과연 페일린은 ‘여자를 시범적으로 출세시키는 것’을 뜻하는 토크니즘(tokenism)의 희생양인가.

‘가족 챙기기’가 가정의 가치?

다 아는 얘기지만 보수주의는 가정이 모든 사회적 가치의 기본이라고 본다.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을 때 언론과 미국인은 그가 워싱턴을 개혁할 적임자라며 환호했다. 다섯 아이의 엄마이고 다운증후군에 걸린 줄 알면서도 막내아들을 낳았다는 그는 미국에서 무너져 내리는 가정의 가치도 복원시켜줄 구원투수로 비쳤다. 이라크전(戰) 파병을 앞둔 맏아들과 혼전 임신한 17세 맏딸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평범한 미국인의 공감을 사며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볼 때 그의 행동은 뭔가 이상했다. 페일린이 셋째 딸을 자주 주지사 집무실에 데려와 놀게 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였다. 우리 사회 같으면 여성 도지사가 자기 아이를 집무실에 데려와 놀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공사(公私)도 구분 못한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래도 ‘자녀가 다섯이나 되는 주부가 부통령 직무에 충실할 수 있느냐’는 사람들을 겨냥해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남자에겐 언제 그런 질문을 해보았느냐”고 호통 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통쾌했다. 그럼 그렇지, 아이들이야 남편이 챙기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웬걸, 페일린에게서 가족과 관련된 온갖 추문이 드러나고 있다. 출장에 자녀를 동반하고 비용을 주(州) 예산으로 지불한 사례가 76회나 된다고 한다. 여동생의 전남편을 경찰에서 해고하라고 경찰청장에게 압력을 행사했다가 통하지 않자 경찰청장을 해임해 버렸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업을 위해 감세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런 일들도 가정의 가치를 지키다 벌어진 것인가.

페일린이 가족을 챙기다 추락하는 과정은 여성 공직자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미국에서도 여성 정치인에게 남편은 득(得)인가, 실(失)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그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결론은 ‘남편 없는 정치인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여성 작가 레티 코틴 포그레빈은 ‘의회에 진출한 미국 여성들 중 미혼이거나 이혼했거나 남편이 사망한 여성이 그렇지 않은 경우의 두 배’라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론 강력하되 가정에선 순종적 아내상을 연출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같은 사람이 없진 않지만 대체로 여성이 출세하려면 독신이 유리해 보인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독신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도 이혼한 뒤에야 꿈을 펼 수 있었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변도윤 여성부 장관도 마찬가지 경우다.

男女의 공직윤리 같아야

우리나라도 여성 정치인과 공직자가 늘어나고 있다. 여성 공직자 비율은 선진화의 한 척도이며 능력 있는 여성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만큼 반가운 일도 없다. 하지만 여성 공직자의 몸가짐이 남자와 다르기를 기대하는 것까지는 무리인가. 현 정부 들어 두 장관 내정자가 낙마했고, 대통령비서관과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이 중도하차함으로써 이 정부 인사가 유독 ‘여성들의 무덤’이 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여성 공직자의 결함이 가족, 특히 남편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편이 오피스텔을 사주었고, 남편이 영종도 땅을 소유했고, 남편이 쌀 소득보전 직불금을 신청한 것들이 문제가 되었다. 페일린은 가족을 챙기는 데 공직을 이용해 말썽이 났지만 한국에선 남편의 재산 관리가 아내의 공직 수행과 정치 행로에 부담이 되고 있다. 과거엔 공직자 아내들이 부동산 투기와 위장전입으로 남편의 앞날을 가로막았는데 이제 남편이 그런 존재가 되는 건가. 이것도 양성평등이 실현되는 과정인가.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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