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증권가 찌라시 vs 판촉물 지라시

  • 입력 2008년 10월 9일 02시 59분


일제강점기의 영향 탓인지 우리 언론계에는 일본말 찌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심지어는 ‘슈킨(集金·돈을 거둬 모음)’처럼 일본어인 줄도 모르고 쓰는 일본어와 ‘도쿠누키(다른 신문이 모두 쓴 기사를 빠뜨리는 경우를 뜻하는 속어)’와 같이 일본 기자들조차 고개를 갸우뚱하는 정체불명의 일본어도 있다.

일본어가 우리말을 오염시키는 사례는 언론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립국어원이 2006년 순화대상이라고 발표한 일본어투 용어는 무려 1171개에 이른다. 흥미로운 사실은 나쁜 것, 싫은 것, 감추고 싶은 것, 비하와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수록 일본인들도 모르는 엉터리 일본어가 질긴 생명력을 보인다는 점이다.

노가다, 고도리, 나가리, 가오마담, 삐끼, ‘쿠사리를 준다’고 할 때의 쿠사리 등도 그런 예에 속하지만 가장 비근한 예가 ‘찌라시’(지라시가 바른 표기)다. 한국에서는 지라시라고 하면 맨 먼저 악성루머의 온상인 증권가의 사설정보지를 떠올리지만 일본에는 ‘증권가 지라시’라는 조어(造語) 자체가 없다.

일본에서 지라시는 통상 ‘오리코미 지라시’, 즉 신문에 끼어 있는 광고전단을 가리킨다. 단어 이미지도 긍정적이다. 다양한 할인정보가 실려 있기 때문에 절약이 몸에 밴 일본인들은 지라시를 아주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 여론조사에서 일본 주부 10명 중 6명이 지라시 품질이 떨어지면 구독 신문을 바꾸겠다고 답했을 정도다.

이처럼 일본에서 지라시는 알뜰한 주부의 벗과 같은 존재이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대형사고’를 낸 적이 있다.

제1차 오일쇼크가 닥친 1973년 10월 오사카(大阪)에서 벌어진 일이다.

센리(千里)뉴타운에 자리 잡은 슈퍼마켓 다이마루피코크는 월말을 앞두고 화장지 특별할인판매를 알리는 지라시를 인근에 뿌렸다. 할인 행사 당일인 31일 오전 가게 문을 연 직원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300명이 넘는 주부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할인판매장으로 몰려간 이들은 1주일 치 화장지 재고를 불과 2시간 만에 바닥냈다.

이 소동은 TV 전파와 신문기사에 실려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어느 지역을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슈퍼마켓에서 화장지를 먼저 차지하려는 ‘전쟁’이 매일처럼 반복됐다. 사재기 광풍은 화장지에서 그치지 않았다. 세제, 소금, 간장, 사탕 등 사실상 생활필수품 전반으로 확산됐다.

다이마루피코크가 만든 지라시에는 어떤 악의도 없었다. 거짓정보가 실려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주 평범한 광고전단이었다. 그런데도 오일쇼크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불안감과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몇 가지 오해가 촉매역할을 한 결과 일본 열도를 심리적 공황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하물며 근거 없는 유언비어, 악의적인 마타도어로 가득 찬 한국의 증권가 지라시에 잠재된 위험성은 다이마루피코크의 지라시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유언비어는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이 불안정하고 혼란할 때일수록 기승을 부린다. 더구나 평상시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낳기도 한다.

지금 세계 경제는 오일쇼크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한국도 태풍 한가운데 놓여 있는 처지다. 증권가 지라시 같은 독버섯을 하루빨리 뿌리 뽑지 않으면 머지않아 ‘만인의 연인’을 잃은 것보다 더한 아픔을 맛보게 될지 모른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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