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당신들의 천국

  • 입력 2008년 9월 10일 02시 56분


‘개그맨보다 웃기는’ 강의로 알려진 스타 목사가 있다. 해학이 넘치면서도 의미가 있는 그의 강론은 많은 청중을 매혹한다. 그런 그가 불교 폄훼 발언으로 말썽이 일자, ‘교회 안에서 신도를 상대로 한 얘기’라며 비판을 일축했다.

불교계가 정권 차원의 종교편향을 규탄하는 가운데 터진 유명 성직자의 설화(舌禍)는 시민적 양식에서 나오는 우려에 귀를 닫는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보수 대형 교회가 이끄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고 나선 것도 비슷하다. 한기총은 ‘종교의 자유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배치되는 다른 종교에 대해 합법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는 비록 신앙의 표현이지만 종교 갈등에 불을 붙일 가능성이 있다. 종교분쟁으로 몸살을 앓아 온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사회에서는 여러 종교가 평화 공존해 왔다. 사회적 관용과 통합지수가 높지 않은 우리 풍토에서 그나마 종교 영역이 예외에 가까웠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큰 행운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나 보수적 개신교의 급격한 팽창은 종교공존의 지형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한국사회 3대 종교인 개신교, 불교, 천주교 가운데 수적으로 불교신자가 제일 많지만 종교의례 참여도와 신앙적 열성의 표현에서 개신교는 불교를 압도한다. 또한 고학력 엘리트와 수도권 중심의 젊은 세대가 개신교에 대거 동참했다. 세계 50대 교회의 절반 정도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만큼 개신교의 놀라운 외형적 발전을 웅변하는 것도 드물다.

배타적 종교집단 사회갈등 불러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갖는 법인데, 지금까지 개신교가 이에 잘 응답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소명의식을 동반한 복음주의와 공세적 선교방식이 대성공을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다. 성공의 이면에는 성장 위주의 물량주의와 독단성이라는 그늘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제도종교가 뿌리를 내릴 때 기복적 물질주의와 권력지향성이 침투하는 게 통례였다. 과거에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개신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현대사에서 다른 종교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개신교의 종교권력화는 그 산물이다. 문제는 권력화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감추지 않을 때 사회적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유혈과 폭력으로 가득 찬 종교분쟁의 역사를 논외로 하더라도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이 공론화하고 있는 지금의 형편이 생생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불교계가 ‘장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총궐기를 감행하는 사태는 개신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에게 심각한 문제다. 상황이 위중할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각자가 종교의 뿌리와 목표에 대해 다시 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종교인은 신앙을 통해 내면을 점검하며 세파에 찌든 마음을 정화한다. 지금 보이는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남이 이런 나의 신앙을 존중해 줄 것을 바란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내가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는 것처럼, 다른 이의 삶의 방식이나 신앙의 진정성도 배려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선포한 헌법조항은 숱한 고난을 거쳐 인류가 도달한 집합적 지혜다. 그리고 나의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른 신앙의 진정성도 배려해야

특정한 종교의 신봉 여부를 떠나 인간은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공유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평생 절이나 성당을 가본 적이 없는 이들조차 어느 정도는 종교적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종교가 인간의 고유한 이런 궁극적 관심을 가로막고, 평화가 아니라 갈등을 조장하며, 영혼이 아니라 물질을 강조한다면 그 종교성에 대한 회의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한국 종교 전체가 총체적 위기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해탈이나 구원을 설파하는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작은 일상의 실천이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믿지 않는 자와 믿음이 다른 이들을 윽박지르는 대신 연민의 마음으로 껴안을 것이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미움과 분열 대신 사랑과 자비의 씨앗을 뿌릴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큰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각종 종교인들로 넘쳐나는 사회가 ‘당신들만의 천국’에 머무르는 건 예수와 부처도 원치 않을 것이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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