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월급쟁이 출신 대선후보

  • 입력 2007년 8월 27일 19시 56분


코멘트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등장은 한국 정치에 일종의 단절(斷絶)로 다가온다. 우선 3김 시대와의 단절이다. 3김의 영향력에서 이토록 자유로운 대선후보를 우리는 가진 적이 없다. 경선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았지만 후견(後見) 관계는 아니었다.

3김과의 단절은 우리 정치의 한 축(軸)을 이뤄 온 1인 보스 정치와의 결별을 뜻한다. 한국 정치 60년을 흔히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개발독재·권위주의, YS-김대중(DJ)의 민주화, 노무현의 이른바 진보·좌파의 시기로 나눈다. 크게 보아 무리가 없는 분류다. 하지만 나는 YS-DJ 시절도 엄밀한 의미에서 권위주의시대라고 본다. 두 사람 역시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본선 당락에 관계없이 이런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의 출현은 또한 명망가 정치, 운동가 정치와의 단절을 상징한다. 대기업 사원 출신이 대선후보가 됐다는 것은 정치가 특별한 사람들의 사랑방에서 보통 사람들의 일상(日常) 속으로 건너왔음을 뜻한다. 직장인 출신이 내로라하는 직업정치인들을 제치고 유력한 대선후보가 됐으니, 정치는 이미 그 특별함과 마키아벨리적 우월성을 상당 부분 잃은 것이다. 정치의 진정한 보통화(普通化)다. 월급쟁이의 꿈은 이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

이 후보는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에 또 한 번의 충격을 줄 것 같다. 정치권력(정부)을 정점으로 자본, 노동, 시민사회가 층하를 이루고 있던 위계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1987년 민주화가 시발점이다.

3金에서 자유로운 李명박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992년 제14대 대선 출마는 정치권력에 대한 ‘자본의 도전’이었다. 이 후보의 경우는 ‘자본의 도전’도, ‘노동의 도전’도 아니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의 도전’일까. 글쎄, 두고 볼 일이다.

어떻든 그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 사회의 위계적 권력구조를 수평적 구조로 바꾸는 데 벌써 기여했다. 다선(多選)의 거물 정치인들이 “정치인으로서 경력이 없으며, 정당에 대해서도 잘 아는 바가 없다”는 그에게 뿌리로 치면 40년 역사의 보수정당, 한나라당을 맡기는 모습은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정치의 탈(脫)정치화’다. 정치가 모든 것에 대해 말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으며 그 중심에 샐러리맨 출신의 대선후보가 있는 것이다.

탈정치화가 궁극적으로 한국 정치의 발전에 기여할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전에도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2년 2월 정주영 회장이 ‘경제 살리기’를 내걸고 창당한 국민당이 원조다. 이 후보도 당시 입당을 권유받았으나 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당은 그해 4월 총선에서 창당 45일 만에 31석을 얻었고 12월 대선에선 정 회장이 비록 3위에 그쳤지만 388만 표를 얻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탈정치의 힘이다. 오전 6시면 당무회의가 열리고, 일류대학을 나온 150명의 현대 출신 당직자들이 종합상사 임직원들처럼 몸을 던져 일하는, 전혀 정당 같지 않은 정당이 전례가 없는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를 엮어 낸 것이다.

국민당은 그런 성과를 냈음에도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정 회장의 낙선과 대선 승자였던 YS의 미움을 산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의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현대 출신들은 원대 복귀했다. 나는 탈정치의 한계를 거기에서 보았다. 우수한 인적 자원과 넉넉한 자금, 뛰어난 기동력이 있다고 모든 정당이 다 ‘지속 가능한 정당’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鄭주영의 국민당이 주는 교훈

이 후보는 경선 승리 후 “한나라당의 체질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경제 살리기와 사회 통합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며 당도 기업 최고경영자(CEO)형이 되는 게 세계적인 추세”라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야 우리 정치의 병폐인 ‘고비용 저효율’을 걷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정치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경선 과정에서 나는 이 후보가 자유, 민주주의, 인권, 언론 등과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가 경제를 살려서 만들고자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정치다. 경제 살리기도 일정 수준의 정치적 역량이 따라 줘야 순조롭다. CEO에서 정치 전문가로의 변신을 서둘러야 할 이유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