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굴기(崛起)와 품격(品格) 사이

  • 입력 2007년 2월 4일 20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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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EBS에서는 ‘대국굴기(大國崛起)’라는 프로그램을 특별기획으로 내보내고 있다. 중국 CCTV가 무려 3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지난해 말 방영한 1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소련) 미국이 어떻게 세계의 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동안 13억 중국인은 모두 일손을 놓고 ‘역사와의 대화’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5일 밤에는 제7편 ‘백년유신(百年維新)’을 방영한다. 일본편이다.

1편부터 몇 편을 봤지만 솔직히 구성만 놓고 보면 아마추어의 눈에도 좀 엉성한 프로그램이다. ‘3년 동안 만들었다는 야심작이 겨우 저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마음은 영 편치 않다. 목구멍에 큰 가시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다.

이웃 일본은 지금 ‘국가의 품격’에 빠져 있다. 작년 일본 열도를 강타한 동명(同名)의 책 때문이다.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 오차노미즈여대 교수가 지은 이 책은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를 제치고 232만 부나 팔렸다. 저명한 수학자인 저자는 오직 일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DNA)를 회복해 세계에 으뜸가는 ‘고고(孤高)한 나라’를 만들자고 역설한다. 전쟁을 금지하고 있는 평화헌법을 고쳐 ‘보통국가’를 되찾자는 일본 우파 정치인들의 생각을 몇 단계 뛰어넘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일본 정치가들이 얘기하는 보통국가는 미국과 같은 나라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유사 이래 ‘이상한 나라’였다. 10년 이상 불황이 계속됐으나 여전히 경제대국이다.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국가의 됨됨이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아침 햇살을 받고 피어났다 바람에 흩뿌려지는 사쿠라 꽃잎을 보며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는 고유한 정서에 휩싸인다고 한다. 사물의 무상함을 바라보며 느끼는 미의식(美意識)이라고 할까. 그런데 일본의 문학은 물론 수학을 세계 최고로 만든 것도, 일본 무사도(武士道)의 사생관(死生觀)을 만든 것도 바로 이 모노노아와레였다고 후지와라는 말한다.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서구의 ‘볼품없는 합리주의’에 맞서 일본의 품격을 높이고 세계 지도국가로 설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오직 모노노아와레와 무사도에 있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중국의 굴기와 일본의 품격. 중국은 지금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하드파워로 굴기를 다짐하고 있다. 그것도 쓸개를 씹어 가며…(CCTV는 올해 들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드라마까지 내놨다). 6자회담도 동북공정도 굴기를 위한 길 닦기에 불과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13억 중국 인구가 대국굴기, 그 네 글자에 몸을 떨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메이지(明治)시대의 ‘백년유신’과 전후(戰後) 경제대국을 넘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본만의 소프트파워로 재무장하려 하고 있다. ‘국가의 품격’이 지닌 논리적 당부(當否)가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그 책의 메시지가 수많은 일본인에게 깊은 공명(共鳴)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우리는?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일으켜 세울 키워드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민족공조, 세금폭탄, 개헌, 87년 체제라는 말들밖에는….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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