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민심의 바다’에서 돌아온 손학규

  • 입력 2006년 10월 9일 19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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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100일 민심 대장정’이 9일 끝났다. 다시 서울에서 만난 그는 한층 건강해 보였다. 오래 깎지 않아 텁수룩해진 수염과 검게 그을린 얼굴에선 활력과 자신감이 묻어 났다. “내 수염은 현장이고 내 얼굴은 민심”이라며 그가 밝게 웃었다. 여의도식 패거리 정치를 거부하고 ‘민심의 바다’로 떠난다고 했던 그는 과연 민심을 보았을까.

그는 전국을 누비면서 민초(民草)들과 똑같이 일하고 먹고 잤다. 농가에선 축사를 청소했고, 막장에선 석탄을 캤으며, 조선소에선 용접을 했다. 강원도에선 수해에 쓰러진 벼를 세웠고, 충청도에선 빵집에서 빵을 구웠다. 그러면서 그는 보고 들었다고 한다. 희망이 없는 삶에 지친 민초들의 눈물과 한숨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얻은 답은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목청 높은 소수가 좌우하는 정치에서, 땀 흘려 일하는 다수가 존중받는 정치로 바뀌어야만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됐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각성(覺醒)이 현실정치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지켜봐야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민심 장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잠재적 대선주자로서의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이벤트쯤으로 여기는 시선들이 많았지만 그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는 묵묵히 땀 흘린 그에게서 많은 사람이 진정성을 느낀 탓도 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한국정치가 바뀔 수만 있다면…” 하는 우리 사회의 갈망(渴望)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정치에 대한 정의(定義)는 정치학자 수만큼 많다’는 말도 있지만 정치는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이 강조한 ‘정치의 적실성(適實性·political relevance)’이 곧 그것이다. 한마디로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정치는 ‘정치’라고도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우리 정치는 문제 해결 능력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사회는 온갖 갈등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데 정치는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조장하고, 거기에 기생(寄生)해 왔다. 지역감정과 편 가르기가 대표적인 예다. 문제 해결 능력이 중시되지 않다 보니 지역에 기대고, 정당의 보스에 기대면 그걸로 다 됐다. 여의도 정치의 본모습이 늘 이러했다.

손 전 지사는 민심 대장정 중에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노트가 8권이나 된다고 했다. 앞으로 이를 기초로 정책화하는 작업을 벌여 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와 잠깐이라도 얘기를 나눈 농민들은 “손 지사 앞에서 농사 얘기를 하지 말라”며 혀를 내두른다고 한다. 농사에 관한 한 그는 어떤 농사꾼보다 많이 알고 깊이 안다. 문제를 알면 해결책도 알게 된다. 한국정치의 적실성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을 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참여정치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여기서 말하는 참여는 ‘국민’의 참여가 아니라 ‘정치 엘리트’의 참여다. 정치 엘리트들이 스스로 대중 속에 뛰어들어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함을 말한다. 대중 속에서 보면 같은 정책도 달라 보인다. 새로운 민주정치 이론인 ‘대중 속에 뛰어들기(going to the public)’가 곧 그렇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쌍방향 민주주의, 대화형 민주주의도 이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의 참여는 노무현 정권의 ‘참여’와는 성격이 다르다. 노 정부는 ‘밑으로부터의 참여’만을 얘기했지 ‘위로부터의 참여’란 개념조차도 없었다. 노 대통령부터가 “시장이나 돌아다니란 말이냐”며 현장을 찾는 것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 밑으로부터의 참여도 국민과 정부 사이에 이념에 경도된 시민단체들이 버티고 있어서 왜곡되기 일쑤였다.

손 전 지사의 민심 장정에 내포된 이런 실험들이 의미 있는 결실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 역시 대권에 뜻을 둔 현실 정치인이고 보면 언제까지나 여의도 정치와 무관한 행보를 계속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지지율이 상승하면 개인적인 욕심도 생길 것이고 “연대하자”는 유혹 앞에선 득실을 따져보기도 할 것이다.

나는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손학규의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의도했건 안 했건 첫발을 뗀 이 정치실험이 만성적 후진 상태에 머물고 있는 우리 정치를 바꾸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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