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영미]조각난 잠을 이어 붙이는 행복, 혹은 푸념

  • 입력 2006년 6월 15일 03시 00분


한국과 토고의 경기가 열리기 9시간 전, 13일 오후 1시경에 나는 집을 나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의 식당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스포츠신문을 샀다. 길가의 가판대에서 자신을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스포츠신문 특유의 촌스럽고 자극적인 붉은색 글씨들을 훑어보며 5분쯤 망설이다 호주와 일본의 경기 결과가 1면에 제대로 실린 A지를 집어 들었다. 2002년 여름에 월간 ‘신동아’의 인터뷰를 위해 만난 황선홍 선수가 내게 추천했던 신문이었다. 일본이 1-0으로 이기고 있다는 전반전 종료 뒤의 상황만이 반영된 B신문의 기사가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낡아 보여, 내 눈이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아, 이래서 기자들이 시간을 다투며 전쟁을 벌이는구나. 평소 나는 지나친 속보 경쟁을 일삼는 언론을 비판했는데, 느리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돈을 주고 사지 않는 나를 돌아보며 깨달았다. 정보의 세계에서는 빠르다는 것이 정확함과 통한다는 사실을.

식탁의 왼편에 신문을 활짝 펼쳐 놓고 따끈따끈한 현지 소식들을 야금야금 음미하며 전주비빔밥 한 그릇을 비웠다. 나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해 음식을 씹으며 눈으로 신문을 읽으면 혀를 깨물기가 일쑤였다. 눈과 입이 동시에 바쁘지 않으면 30분 안에 끝날 식사가 1시간은 족히 걸렸다. 점심시간에 4인 식탁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약간 미안했지만, 단골손님이니 그 정도는 눈감아주리라 믿으며 호나우두의 인터뷰를 탐독했다. 내가 사랑했던 스타가 체중 조절에 실패해 망가지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재능을 의심한 적이 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었다. 축구든 문학이든 그 정도의 자신감이 없다면 최고가 되지 못했으리라.

점심식사를 마친 뒤에 집에 돌아와 치즈 케이크와 요구르트인지 아이스크림인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나 무언가 차갑고 달콤한 후식으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한국과 토고의 경기가 열리기 2시간 전, 오후 8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잔뜩 무거워진 위장을 뉘어 휴식을 취하노라면 언젠가 잠이 오겠지. 그러나 내가 기대하던 잠은 오지 않고, 피곤한 귀에 복도의 소음이 크게 울렸다. 내 아파트의 이웃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예의 없이 시끄러운가? 대낮에 아파트에 모여 술을 마시며 “오∼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성인 남자들의 직업은 대체 무엇일까 상상해 보며 자지도 깨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간을 보냈다.

월드컵 개막 이후 며칠째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와 그제의 이틀을 합쳐 4시간도 자지 못했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매일 3경기가 열린다. 작가답지 않게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던 내 몸은, 낮과 밤을 거꾸로 사는 데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전 1시에 시작하는 두 번째 경기의 전반전을 본 뒤부터 갑작스럽게 시력과 체력의 저하가 나타났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뻐근해 똑바로 앉아 있기가 힘들었지만 한 경기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안방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다음 경기가 시작되는 시간에 자명종을 맞춰 놓은 뒤 1시간 남짓한 틈새에 깜박 졸다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하기. ‘조각난 잠’을 이어 붙이는 재미 혹은 피곤을 월드컵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토고를 박살내겠다는 골키퍼 이운재의 다짐대로 한국팀이 귀중한 원정 첫 승을 거두었다. 역전골을 넣은 다음 지키기 작전에 들어간 경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감을 갖기에는 충분한 점수이다. 지난 몇 달간 나라 전체가 “대∼한민국”을 외쳤던 국민에게는 충분하지 않은 작은 승리를, 맥주를 마시며 나는 축하했다.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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