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실패할 자유가 그립다

  • 입력 2006년 2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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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정문 앞에 늘어선 꽃다발 좌판들을 지나치며 문득 나의 졸업식을 회상해 봤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풍경이 없다. 식장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교수님이랑 기념사진은 찍었는지, 하다못해 어떤 옷을 입고 갔는지도…. 20년이 넘은 일이라 해도 대학 졸업식에 아무런 추억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씁쓸했다.

요즘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하기야 초중고교 졸업식 때도 별로 인상적인 순간은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모든 졸업생이 저마다 주인공인 행사이기보다는, 천편일률적인 축사들과 소수를 위한 지루한 상장 수여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언젠가 미국 신문에 대학 졸업식의 축사만 모아 놓은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부터 영화배우 기업인 사회운동가 골프선수 등 각 대학의 초청 연사들은 무미건조한 판박이 연설이 아니라, 각자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주었다. 그중에서도 마리오 바탈리라는 이탈리아 요리사의 축사는 흥미로웠다.

“여러분께 한 가지 레시피(조리법)를 알려 드릴까요? 우선 소금 넣은 물에 스파게티를 삶으세요.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넣은 뒤 얇게 저민 마늘과 채 썬 붉은 피망을 넣습니다. 국수가 다 삶아지면 팬에다 붓고 잘 섞은 다음 다진 파슬리와 스파게티 삶은 물을 약간 넣습니다. 접시에 국수를 담고 파르메산 치즈를 뿌리면 요리가 완성됩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방금 멋진 스파게티를 완성했습니다. 요리는 아이디어입니다. 경험입니다. 법칙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갈 때 다른 사람의 성공 비결을 보고 좌절하거나 흉내 내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법칙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돼 있으니까요.”

이 축사를 들은 졸업생들은 적어도 스파게티 요리법 하나는 확실히 챙겼을 것 같다. 요리든, 성공이든 정답이 따로 없으니 나대로, 내 식대로 과감하게 도전해 보라는 메시지도 덤으로.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 아는 것을, 대학 문을 나서던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젊음엔 마음껏 ‘실패할 자유’가 허용돼 있다는 점이다. 뭔가 꿈이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도하고 다시 시도하고, 부닥치고 또 한번 부닥쳐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로서 숱한 사람을 만나면서 얻은 교훈은, 크게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크게 성공한다는 소박한 진리였다.

만약 미리부터 인생의 쓴맛이 두려워 모든 것이 준비되는 순간만 기다리다간 결코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다. 그러니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든든한 배경이나 큰돈이 아니라 비틀거려도 쓰러지지 않고, 넘어진다면 다시 일어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다.

어느 길이나 계속 쭉 뻗은 길만 있으란 법은 없다. 꺾어지는 길도, 가파른 길도, 심지어 거꾸로 돌아가는 길도 있다. 하지만 그 길목 어딘가엔 희망도 숨어 있을 것이다. 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길 탓만 할 일도 아니다. 넓은 눈밭에서 자기가 밟고 지나온 발자취가 어디 똑바른 적이 있던가.

“콜럼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이다.”(빅토르 위고)

고미석 문화부 차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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