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난파

입력 2005-11-14 03:00수정 2009-10-0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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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 1921년 작곡한 ‘봉선화’는 일제 치하 조선인의 애창곡이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며 민족의 처지를 슬퍼한다. 일제 탄압이 극심하던 1942년 4월 소프라노 김천애는 도쿄에서 열린 전(全)일본 신인음악회에 흰색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렀다. 그 자리에 있던 조선인들은 눈물의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귀국한 김천애가 이 노래를 자주 부르자 일제는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다.

▷홍난파는 국내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부인 이대형의 회고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난파는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저당 잡히고 그 돈으로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찍어 배포했다. 그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았으며, 옥고를 치를 때 얻은 늑막염이 도져 1941년 43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사망한 부인은 유언으로 “내 죽음을 알리지 말며, 특히 TV에 비밀로 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홍난파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면서 혹시라도 불씨가 커지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리라. 부인의 참담한 심정을 미뤄 짐작할 만하다.

▷음악인들이 ‘홍난파 변호’에 나섰다. 8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홍난파를 친일파 명단에 올린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지난주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홍난파 옛집에서 추모음악회를 열었고 오늘은 세미나를 갖는다. 친일로 거론되는 인사를 옹호라도 하면 즉각 친일파로 몰리는 세태에서 음악인들이 전면에 나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난파를 사랑하는 음악인들은 이런 야만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치는 언제나 예술가들을 선전선동에 동원해 왔다. 식민지 통치에다 전쟁까지 겹친 시절의 상황을 후대(後代)의 느낌과 상상력으로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홍난파의 일생을 객관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앞뒤 사연을 듣고 아는 같은 음악인들이 아닐까.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시작한 역사 청산에서 홍난파의 처지가 노래 속의 ‘봉선화’ 같다. 슬픈 일이다.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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