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석동빈]“APEC만 넘기자” 부산 눈가림 도시정비

  • 입력 2005년 11월 2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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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부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동서고가로 일부 구간에 8월 말 높다란 초록색 가림막이 등장했다.

이 가림막은 낙동램프∼학장램프 양방향 4.2km 구간에 설치돼 있으며 높이는 1.5m. 4억2000만 원이 들었다. 목적은 경관 미화. 물론 외국 정상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부산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공단지역인 이 구간은 굴뚝과 전깃줄 등으로 경관이 지저분해 차폐시설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김해공항 부근인 부산 강서구 대저2동 주택 19가구는 5월 반강제적으로 외벽에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강서구청이 돈을 댔다. 인부들은 집주인이 없으면 담을 넘어 들어가 칠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공항에서 보이는 쪽만 산뜻하게 옷을 입혔다. 그러나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강서구청은 뒤늦게 나머지 외벽에도 칠을 해줬다.

부산시는 또 APEC 관계자들이 묵을 호텔 주변 건물 143곳의 옥상을 정비하면서 일부 건물에 초록색 방수액을 발랐다. 보기 흉한 물탱크를 가린다며 갈색 페인트를 칠한 합판을 덧씌우느라 예산 수억 원을 사용했다.

APEC 정상회의를 대비한 부산시의 ‘눈가림식’ 환경정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상들의 이동로인 김해공항∼해운대 구간(20여 km)은 말끔히 단장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조금 벗어난 부두로 재송로 우암로 등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도로에는 팬 곳이 널려 있다.

이런 행정으로 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지난달 18일 오전 8시경 승객 승무원 등 3700여 명을 태우고 부산항에 들어온 초호화 유람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11만6000t)의 일부 승객은 “부산항이 지저분해 관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며 아예 배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버스투어를 다녀온 승객들도 “도시가 산만해 보고 즐길 것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유람선은 불과 10시간 만에 부산을 떠났다.

시민 김승희(39·의사) 씨는 “빈약한 예산 때문이겠지만 ‘일단 가리고 보자’는 행정을 보면 한국이 아직도 개발도상국 같다는 참담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석동빈 사회부 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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