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22>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29일 03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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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韓王) 신(信)이 그런 패왕에게서 무얼 보았는지 풀썩 무릎을 꺾으며 말했다.

“대왕께서 신(臣)을 거두어만 주신다면 이제부터라도 개나 말의 수고로움(犬馬之勞)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간절하다 못해 비굴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고 죽어간 주가와 종공이 워낙 심하게 비위를 상하게 한 탓인지, 패왕은 평소 그답지 않게 그런 한왕 신에게 너그러워졌다.

“그렇다면 왜 진작 성문을 열고 항복하지 않았느냐?”

“주가와 종공이 눈에 불을 켜고 살피는 통에 어찌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위왕(魏王) 표(豹)를 죽인 일은 대왕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왕 신이 어른에게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변명했다. 패왕도 발 앞에 떨어진 위표의 잘린 머리를 본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주가와 종공의 모질고 독한 사람됨에 치를 떤 터라 더욱 한왕 신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잠시 말이 없다가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왕 신을 풀어주어라. 저를 왕으로 세워준 이를 섬긴 것이 무에 그리 큰 허물이 되겠느냐? 이제라도 과인에게 항복하였으니 그를 한번 믿어보기로 하자.”

그리고 다시 한왕 신을 살펴보며 다짐 받듯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과인을 따라 성고로 간다. 거기서 한왕 유방을 사로잡는 데 공을 세운다면 과인도 그대를 왕으로 세워 주겠다. 그러나 만약 다시 과인을 저버린다면 땅끝까지 뒤쫓아 가서라도 그 목을 어깨 위에 남겨 놓지 않으리라!”

이어 패왕은 초나라 군사들의 창칼에 묻은 형양성 군민(軍民)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성고(城皐)로 군사를 몰아갔다. 두 성 사이가 겨우 50리 남짓이라, 날이 저물기 전에 성고성은 패왕이 이끄는 5만 대군에 다시 에워싸였다.

“동서남북 어디로든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이번에는 반드시 한왕 유방을 사로잡아 천하의 형세를 결정해야 한다!”

패왕은 그렇게 장졸들을 몰아대며 당장이라도 성고성을 둘러 엎을 듯하였다. 그러나 형양성을 치느라 힘을 뺀 탓인지 패왕은 그날 밤도 다음 날도 공성(攻城)을 시작하지 않았다. 다만 높은 곳에 망대를 세워 성안을 살피게 하며 형양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나절 싸움으로 성을 우려 뺄 기회만 엿보았다.

그런데 알 수 없게도 먼저 움직이는 것은 성안에서 지키고 있는 한나라 군사들 쪽이었다. 성을 에워싼 지 사흘 째 되던 날 해질 무렵 하여 높은 망대에서 성고성 안을 살펴보던 군사가 패왕에게 알려왔다.

“성안의 한군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성벽 위는 조용하나 성벽 아래서는 움직임이 매우 활발한데, 특히 서문 쪽이 그렇습니다. 신시(申時)부터 서문 근처에 치중(輜重)이 슬몃슬몃 옮겨와 쌓이는 듯하고, 기마대와 갑병도 모두 그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힘을 모아 서문 쪽으로 치고 나와 관중(關中)으로 달아나려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곁에서 함께 듣고 있던 종리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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