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남성욱]장관급회담의 대차대조표

  • 입력 2005년 6월 2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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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은 최근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 면담의 후광(後光)이 확실하게 반영된 회담이었다.

3쪽에 이르는 장문의 공동보도문은 전례가 없고 합의된 의제도 역대 어느 회담보다 다양했다. 과거 이행 여부도 불확실한 합의문안 자구(字句)에 목을 매 회담대표들이 서울과 평양의 훈령을 기다리며 밤을 새우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던 소모적인 회담과는 차별화된 회담이었다. 김-정 면담에서 총론이 합의된 만큼 각론에서 후속 일정을 정하는 회담을 질질 끌 이유는 없음에 따라 최초로 폐막 하루 전에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남북 양측의 회담 결과 대차대조표를 살펴보면 과거 회담 패턴대로 북측은 경제적인 실리를 챙겼고, 남측은 긴장완화를 이루었다. 북측은 우선 절박한 식량난을 호소하여 예년 수준의 쌀 40만 t과 비료 15만 t을 얻어냄으로써 남측으로부터 원하던 것을 받아냈다. 또 남북농업협력위원회를 구성하여 향후 남측의 체계적인 농업지원이 가능한 발판을 확보하였다. 북한은 민간선박의 제주해협 통과를 끌어내 서해에서 동해로 가는 선박의 항해거리를 400해리 이상 줄이고 항해 일정도 하루 반 정도를 단축하는 숙원과제를 일거에 해결하였다. 항공 직항로 문제가 김 위원장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거론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남측은 이산가족 상봉과 이산가족상설면회소 착공 등의 일자를 합의해 남북대화를 통해 이산가족의 아픔이 치유되도록 하였다. 적십자회담에서 국군포로 및 납북자 생사확인 문제를 협의하기로 하였다. 특히 수산분야 등 새로운 분야까지 회담 영역을 확대한 것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풍성한 합의문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담도 지난 14차례에 걸친 장관급회담처럼 몇 가지 구조적인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합의사항의 성실한 실천 여부이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이산가족 화상상봉, 남북직항로 개시 등 남북 간에 이뤄진 화려한 합의는 이행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진의를 의심하게 하였다. 북한이 쌀과 비료에만 관심이 있다는 지적에서 벗어나려면 공동보도문의 각종 합의 사항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 특히 북한이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8월 적십자회담에서 어느 정도까지 협의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향후 각종 회담이 구체적인 결실 없이 이벤트성의 일회성 회의를 하고 지지부진해진다면 남북대화에 대한 국민의 높은 기대는 깊은 불신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합의사항의 후속이행이 담보되는 제도적인 보완장치 마련이 절실하다.

다음은 여전히 북핵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성과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물론 장관급회담은 북핵 논의의 장이 아니라는 해명도 있으나 시기적으로 볼 때 남북대화와 북핵이 구별될 수는 없다. 공동보도문의 ‘분위기가 마련되는 데 따라’라는 북핵의 평화적 해결조건은 김 위원장의 6자회담 복귀의 전제인 ‘미국의 북한 존중, 인정’ 발언과 대동소이하다.

특히 비핵화 언급은 원론적 차원의 것으로, 북핵에 초점이 모아진 남측 여론에 대한 북한 특유의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북한은 북-미 간 뉴욕채널을 통해 미국과의 담판으로 날짜를 확정할 경우 또 다른 빅딜이 가능하다는 계산을 하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남측의 북핵 해결 중재자 역할은 ‘반보(半步) 진전’에 그치고 말았다.

미국이 5만 t의 대북식량 지원을 약속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도 대북 자극발언 자제를 약속하는 등 최선의 성의를 보이고 있다. 이제 북한의 결단만 남았다. 7월 중 북한의 6자회담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동보도문의 합의도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크다. 6자회담 관련국들은 7월에도 회담이 재개되지 않는다면 북한이 시간끌기 전략으로 남북대화를 활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할 것이며, 이 경우 남북 화해국면도 장애에 부닥칠 것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 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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