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5년 박정희-김영상 영수회담

  • 입력 2005년 5월 20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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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인 1975년 5월 21일 오전. 제1야당 신민당의 김영삼(金泳三·YS) 총재가 청와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그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 모습 그대로 전형적인 투사의 용자(勇姿)였다.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한 사람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다. 한 달 전 남베트남 정권이 패망하면서 국내외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통령은 야당 총재에게 어떤 제안을 하려는 것일까. 신민당 정무회의에서는 동아일보의 광고 해약 사태 등 언론 탄압의 중지, 긴급조치의 해제, 구속 민주인사의 석방 등을 강력히 요구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대좌는 예상보다 길어져 두 시간을 넘겼다. 그러나 카메라맨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예상과 딴판이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처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다정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차에 오른 YS는 측근들의 채근에도 대답이 없었다. 얼마 뒤 ‘정상회담은 유익했다’는 청와대의 발표가 나왔다. 무엇을 논의했으며 어떤 문제에 합의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두 ‘영수’는 굳게 닫은 입을 열지 않았다.

훗날 YS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정희는 창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처가 없으니 이 큰 집이 절간같이 느껴집니다’라고 합디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을 닦았어요. ‘날 믿으시오. 민주주의를 꼭 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여권)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요. 권력을 잡으리라 예상되는 사람에게 몰려 통치가 되질 않아요. 그러니 이 얘기는 우리끼리만 한 걸로 합시다’라는 겁니다. 죽은 아내를 들먹이며 눈물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러면 언제 민주화를 할 거냐’고 다그칠 수 있습니까.”

속사정이야 어쨌건 간에 신민당은 유화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권의 대응은 기대와 달랐다. 10월, 관제 데모를 비판한 김옥선(金玉仙) 의원의 국회 제명 파동으로 정국은 다시 경색되기 시작했다. 이듬해 YS는 이른바 ‘각목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잃고 만다. 1979년 다시 총재로 선출된 YS는 ‘배신당했다’는 독기로 충천해 있었다. 박 대통령과 YS의 극한 대결은 결국 이 해 10월의 10·26 사태로 치달았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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