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칭은 산둥(山東) 성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5세 때인 1929년 지난(濟南)의 실험극원에 들어가 연극배우가 됐다. 하지만 배우로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랬던 그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공산주의 활동에 매진했던 1939년 ‘영웅호색’ 마오의 네 번째 아내가 되면서부터.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장칭은 남편에 대한 내조보다는 외조에 힘을 기울였다.
훗날 마오는 “장칭이 나에겐 무관심하고 오로지 정치에만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문화대혁명(1966∼76년)은 이런 그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통치력 누수와 함께 건강이 악화된 남편을 대신해 군과 홍위병을 호령하며 중국 대륙을 피로 물들였다. 자신을 당나라의 여황제 측천무후에 비유한 그가 누린 절대 권력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포커를 하다 지면 괴성을 질러댔고 젊은 병사로부터 수혈을 받는 기행을 저질렀다. 상대방이 말대꾸를 하거나 목청을 높이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집어던졌고 의자에 앉을 때는 자신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게 했다. 반대파들이 자신을 죽이거나 정탐하려 한다면서 최측근인 비서를 스파이로 몰아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은 무상한 것. 극심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오는 후계자로 장칭이 아니라 권력의 외곽에 있던 화궈펑(華國鋒)을 임명해 조정 역할을 맡겼다. 게다가 마오가 1976년 9월 사망하자 한 달도 채 안돼 문화대혁명 시기에 박해를 받았던 덩샤오핑(鄧小平) 계보의 실용주의자들이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체포하게 된다.
1981년 인민재판장에서 사형판결이 떨어지자 “나는 아직 마오 주석의 후계자”라며 법정에 드러누워 발악을 한 장칭. 감옥에서도 정적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로 일관했던 그에게 죽음이야말로 안식의 길이었을 것이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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