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20>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3월 31일 19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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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여기가 결판을 낼 싸움터다. 모두 돌아서서 적을 쳐라. 먼저 와있던 우군과 힘을 합쳐 적을 무찌르고 싸움을 끝내자!”

뒤따라오던 한군 장졸들은 한신의 그 같은 외침을 듣고 오히려 힘이 쭉 빠졌다. 미리 간 군사가 그리 많지 않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곳에 이르면 무언가 반드시 적을 쳐부술 수 있는 계책이 마련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작은 군사로 큰 군사를 이겨낼 만한 지리(地利)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슨 대단한 설비나 굳건한 진채가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몸 가릴 만한 목책 한줄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허허벌판에 보태진 것이라고는 겨우 밤잠을 설친 군사 1만이 고작이었다.

두어 각(刻)을 쫓겨 오는 동안에 새삼 자라난 패배감과 두려움도 그새 한 타성(惰性)이 되어 한군을 내몰았다. 한신의 비장한 외침을 듣고도 멈추어 되돌아서서 싸우려는 장졸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다급하게 쫓기는 마음이 되어, 아직 적이 이르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내달을 뿐이었다.

한신을 따라온 본진의 장졸들이 그렇게 내쳐 달아나자, 미리 와서 기다리던 별대(別隊)도 적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어슬렁거리며 일어나 창칼을 집어 들기는 하였으나, 본진의 패배감과 두려움에 전염이라도 되었는지 기세부터 영 말이 아니었다. 흘깃흘깃 눈치나 보다가 달아나는 본진 뒤에 슬금슬금 따라 붙었다.

하지만 그런 한군 본진도 별대도 멀리 달아날 수는 없었다. 한 마장도 닫지 않아 시퍼런 저수((저,지,치)水) 물결이 그들 앞을 가로 막았다. 배 없이 건너기에는 너무 넓고 깊은 물이었다. 거기다가 때는 이미 물가에 살얼음이 끼는 시월도 하순이라, 헤엄쳐 건널 수도 없었다.

“강물이다! 더 물러날 수가 없다.”

“배를 찾아라! 배가 없으면 떼라도 엮어보자.”

“이번에는 나무로 만든 앵(罌)과 부(L)도 없느냐?”

군사들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강물을 바라다보며 웅성거렸다. 그때 맞은 편 벌판에는 아침햇살을 등진 조나라 기병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그 사이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조나라 대군이었다.

조군이 다가오는 것을 본 한군은 한층 큰 두려움에 휘몰려 허둥대기 시작했다. 어떤 병졸을 벌써 창칼을 내던지고 실성한 듯 날뛰기도 했다. 그때 한신이 달려와 매섭게 소리쳤다.

“더 물러날 곳은 없다. 이기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하겠느냐? 싸워 이겨 비단옷 걸치고 고향의 부모처자에게 돌아가겠느냐? 개돼지처럼 죽임을 당해 흰 뼈를 이 저수((저,지,치)水) 가에 흩겠느냐?”

한신의 그런 외침에 잠시 저수가가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퍼뜩 한신의 뜻을 알아차린 장수들이 먼저 나서 칼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모두 돌아서라. 짐승처럼 때려 잡히느니 싸우다 죽자!”

“달아나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고, 죽기로 싸우면 오히려 살길이 있다. 모두 죽기로 싸워 살길을 찾자!”

그때 다시 한신이 소름이 돋을 만큼 차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깨웠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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