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69>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27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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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남은 50리 길 한신은 이(里)마다 마실 것과 병과(餠菓)를 베풀고, 정(亭)마다 밥과 고기를 차려냈다 할 만큼 먼 길에 지치고 주린 한왕의 장졸들을 잘 대접했다. 특히 수많은 군민(軍民)을 풀어 형양으로 드는 마지막 정에 차린 점심은 그대로 호화로운 잔치나 다름없었다. 또 한왕에게는 따로 왕이 타는 수레와 위엄 있는 전포(戰袍)를 갖춰 보내 군색하게 쫓겨 온 행색을 감출 수 있게 했다.

한왕이 형양성 동쪽 벌판에 이르렀을 때는 여름 5월의 해가 제법 뉘엿할 무렵이었다. 한신은 그동안 모은 5만 대군을 벌판에 늘어세워 진세를 벌여놓고 한왕을 맞아들였다. 어떻게 장졸들을 몰아대고 다그쳤는지 그 진세의 삼엄함이 열흘 전만 해도 초나라 군사들에게 짐승 몰리듯 하며 죽어가던 그 한군(漢軍) 같지 않았다. 대장군의 기치를 앞세우고 백마에 높이 앉아 진문 앞에 나와선 한신도 팽성 싸움에서 수십만 대군을 잃고 수수 강변을 이리저리 쫓기던 그 한신이 아니었다.

“알 수 없구나. 대장군이 이 군사 56만을 거느리고 항왕의 3만 군사를 막아내지 못하였다니. 실로 무엇에 홀린 듯하다.”

한왕이 군사들을 둘러보다 탄식처럼 말했다. 한신이 별로 무안한 기색 없이 받았다.

“이기고 지는 것은 싸움하는 이에게는 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대장군으로서 싸움터에 나와서도 위로 임금의 눈치를 보고 아래로 장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군령(軍令)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했으니, 그같이 용렬한 장수가 어찌 싸움에 이기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제후들과 그 군사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은 과인의 허물이었소.”

“군자는 지난 일을 허물하지 않는다[왕자불구]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신하 되어 어찌 감히 군왕을 허물하겠습니까? 다만 스스로 다짐하는 바는 일후에는 두 번 다시 어리석고 못난 장수 노릇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못난 장수는 싸움에 지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 같은 적에게 두 번 지는 장수일 것입니다. 하오나 신은 이제 항왕과 초나라 군사에게 다시 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런 한신의 다짐은 결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그 뒤 정말로 한신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두 번 다시 진 적이 없었다. 한왕과 한군은 그 뒤로도 되풀이 항왕과 초나라 군사에게 험한 꼴을 보게 되지만 그때는 모두가 한신이 없을 때였다.

그와 같이 자신에 찬 한신의 다짐에 한왕은 문득 하읍(下邑)에서 장량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지난 일을 툭툭 털어버리고 달래듯 한신에게 말했다.

“이번 팽성의 낭패는 모두 과인의 허물 때문이었소. 대장군은 천하를 떠받들 기둥이요 대들보외다. 다시는 싸움터에 나와 대장군을 간섭하지 않을 터이니, 부디 과인을 도와 강성한 반적들을 무찔러 주시오. 천하 한 모퉁이의 주인이 되어 나와 함께 길이 복덕(福德)을 누리도록 합시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대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하였습니다. 신은 대왕께서 알아주신 은혜만으로도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삼가 대왕을 위해서라면 개나 말의 수고로움[犬馬之勞]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한신도 감격한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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