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58>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14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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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러는 사이에 한왕이 탄 수레는 수수(휴水) 물가에 이르렀다. 추격을 피하느라 남쪽으로 길을 약간 도는 바람에 하읍(下邑)을 끼고 도는 수수에서 30리쯤 하류(下流)되는 곳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물가의 갈대와 버드나무숲으로 가려진 샛길로 접어들면서 한왕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는 지고 붉은 노을이 비껴 있었다. 이제 적을 따돌렸다 싶어 가만히 가슴을 쓸고 있는데 갑자기 길 옆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막았다.

한왕이 놀라 바라보니 다행히도 초나라 추격대가 아니라 한군 패잔병들이었다. 한 300명이나 될까, 영벽(靈壁)에서 중군(中軍)으로 싸우다 쫓기던 그들은 한왕을 알아보고 환성과 함께 따라붙었다. 머릿수는 많지 않아도 다시 호위하는 군사가 생기자 한왕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다시 길을 재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로 감격스러운 일이 생겼다. 죽은 줄 알았던 노관이 50여 기를 모아 한왕을 찾아온 일이었다. 그 또한 여택(呂澤)에게 의지하려고 하읍으로 달아나던 노관은 한 군데 풀숲에 숨어 쉬다가 한왕의 수레를 만나자 구르듯 달려나와 한왕 앞에 엎드렸다.

하지만 한왕이 온전히 마음을 놓은 것은 그날 저물 무렵 장량과 진평의 마중을 받고 나서였다. 전날 싸움터에서 용케 몸을 뺀 장량과 진평도 하읍으로 달아나 여택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후영이 보낸 군사로부터 한왕이 그리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듣자 여택의 부장(副將)과 더불어 3000군사를 이끌고 마중 나온 길이었다.

몇 천의 장졸이 에워싸고 지켜 주는 데다 하읍도 멀지 않은 곳이라 한왕도 이제는 적의 추격이 두렵지 않았다. 그 자신감 때문일까, 수레를 버린 한왕이 말 한 필을 끌어오게 했다. 그리고 그 말에 오르면서 아직도 수레에 앉아 멍해 있는 공자 영(盈)과 공녀를 가리키며 성난 목소리로 하후영에게 소리쳤다.

“어서 저 못난 것들을 끌어내 과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려라! 하마터면 숱한 우리 한군 장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할 뻔하지 않았느냐?”

뒷날 ‘삼국지연의’는 그보다 400년 뒤의 일을 이야기로 꾸미면서, 당양(當陽) 벌판에서 주군 유비의 아들을 갑주 안에 품은 채 조조의 100만 대군 사이를 뚫고 나오는 조자룡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무용담을 들려 준다. 그리고 조자룡이 그렇게 구해온 아두(阿斗)를 유비가 땅바닥에 내던지며 ‘너 때문에 하마터면 아까운 장수를 죽일 뻔하였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그 두 이야기는 모두 정사(正史)에는 없는, 이른바 ‘세 푼(三分)의 허구’에 속한다. 아마도 그 허구의 원형은 400년 전 그날의 등공(등公) 하후영과 한왕 유방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뒷날 태자로 책봉되어 전한(前漢) 효혜제(孝惠帝)가 된 공자 영과 노(魯) 땅을 봉지로 받아 노원공주(魯元公主)로 불리게 되는 공녀의 감정은 한왕과 아주 달랐다. 공자는 황제가 된 뒤에도 하후영이 목숨을 걸고 자기를 지켜 준 그날의 은덕을 잊지 않고 각별히 대했다. 그리고 노원공주도 살벌한 여씨(呂氏) 치세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웠던 하후영을 알게 모르게 돌보아 줌으로써 그날의 은공을 갚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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