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14>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23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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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어찌된 일이오? 서초(西楚)의 도성을 지켜야 할 장수가 어찌하여 이렇게 멀리 산동(山東)을 떠돌고 있소?”

패왕이 이번에는 성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패왕의 집안 아재비뻘 되는 항양이 사사로운 척분(戚分)을 떠난 군례(軍禮)로 패왕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신을 목 베어 도성을 잃은 죄를 물어주십시오. 한왕이 60만 대군으로 불시에 밀려드니, 탕현(탕縣)과 하읍(下邑)에 이어 팽성의 외성(外城) 격인 소성(蕭城)과 유성(留城)까지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떨어져 버렸습니다. 거기다가 팽성은 사방이 열린 땅에 세워진 성인 데다, 아부(亞父)와 계포 장군께서 떠나며 남긴 군사도 늙고 쇠약한 3만밖에 되지 않아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왕께 의지해 뒷날을 도모하고자 사람과 재물만 거두어 빠져나왔으나 그나마 한군(漢軍)의 추격을 만나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으니 죄만 더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말에 패왕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뒷날을 도모한다는 말은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이 항용 내세우는 구실로만 여겨졌다. 사람과 재물을 보전하려 했다 하나 그것도 모두 빼앗긴 마당에는 비루한 핑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성난 패왕이 군령관(軍令官)을 불러 항양을 끌어내게 하려 할 때였다. 항양 뒤로 부장(部將)이나 사졸의 복색을 하고 모여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이 패왕의 눈길을 끌었다. 모두 갑옷투구로 몸을 싸고 있었으나 몸매나 생김이 아무래도 싸우는 장졸 같지가 않았다.

무심코 그들을 훑어보던 패왕은 곧 그들이 팽성의 궁궐에서 일하던 내시와 도필리(刀筆吏)들임을 알아보았다. 팽성에서 몸을 빼낸 뒤로 싸움터를 헤쳐 오다 보니 전포와 갑옷투구로 몸을 가리게 된 듯했다.

(팽성에서 용케들 빠져나왔구나. 그래도 항양이 팽성에서 빼내 데려오던 사람들을 모두 한군에게 빼앗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길로 그들을 더듬던 패왕은 그중에 한 사람 호리호리한 몸매와 희고 아리따운 얼굴의 소년 장수와 마주치자 갑자기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터질 듯하던 심사가 환히 풀어졌다.

그 소년 장수는 바로 우(虞)미인이었다. 그제야 패왕은 팽성이 한왕 유방에게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줄곧 자신의 심사를 터질 듯하게 한 것이 바로 그녀였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늙은 장돌뱅이 호색한의 품에 안긴 우미인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3만으로 60만의 심장을 비수처럼 찔러간다는, 그런 긴박하고 맹렬한 반격을 구상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여, 우여, 너를 어찌 할꼬, 하였는데 이렇게 왔구나. 항양이 반드시 몹쓸 짓만 한 것은 아니었다….)

패왕이 다시 그렇게 중얼거리며 살피니 다른 것도 보였다. 군량이나 치중만은 아닌 수레가 여러 대 끌려오고 있는데, 짐작으로는 도성의 도적(圖籍)이나 문서와 인수(印綬) 같은 것들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항양은 패왕의 옥새를 비롯해 팽성 궁궐과 창름(倉(늠,름))에 있던 중요한 물품들은 거의 보존해 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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