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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1월 19일 17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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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한 축에는 서정인(68·전북대 영문과 명예교수)이 있다. 1962년 ‘사상계’에 ‘후송’을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40여년간 글로써 세상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산문학상 수상작 ‘용병대장’ 이후 4년 만에 발표한 연작 소설집 ‘모구실’은 14편의 단편을 연작 형태로 엮은 소설집이다. 각각의 다른 제목은 언뜻 보면 제각기 단편소설 같지만 같은 인물이 이야기를 엮어 가고 있기 때문에 한 편의 장편으로 읽힌다.
제목 ‘모구실’은 하루에 한두 차례만 버스가 오가는 산간벽촌. 소설은 50대 중년 남자 천수건이 보건소 소장으로 있는 딸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오랜만에 딸과 만나지만 “빨리 돌아가라”는 성화에 못 이겨 보건소를 빠져나오다 한 폐교로 향한다. 그리고 폐교를 지키는 서존만 및 점방 할머니 아들 조성달과 조우하고 즉석 술판을 벌인다. 소설은 이 세 사람이 펼치는 온갖 세상 이야기이다.
서존만 모친의 개가, 조성달 아들의 불효, 천수건의 집안 사정 등을 펼쳐 내던 세 사람은 술기운이 달아오르자 차츰 동서양 고전과 신화,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망라한다.
‘아프리카 사람들한테 맨발로 다니지 말고 구두를 신으라고 해 봐라. 그러면 그들은 군화를 신고 동족을 도륙할 것이다. 구두가 오면 구두만 오냐? 줄줄이 서양문명이 뒤따라온다. 맨발로 살면 신경통이 없다더라’는 세계화에 대한 풍자, ‘광복 50년에 집권당만 여덟이다. 권력자 하나가 당 하나를 만들었다. 당이 권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당을 만들었다’는 사회 비판, ‘죽음에 이름표가 있냐? 부자의 죽음과 빈자의 죽음, 미인의 죽음과 추물의 죽음이 서로 다르냐?… 이베리아 반도 바닷가나 히말라야 산맥 산골 어디의 죽음도 정중히 애도하고 우리 동네, 우리 집의 그것도 애이불비,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으면, 평화가 온다’는 삶에 대한 성찰까지 세 사람의 대화는 전방위로 펼쳐진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김현의 지적대로 ‘귀중한 돌을 갈듯 말 하나하나를 경건하게 다듬는’ 서정인의 문체는 실험적이고 독특하다. 그 실험의 절정이라 할 만한 이번 작품집에서 작가는 지문을 거의 없애고 대화만을 나열해 한 편의 질펀한 마당극을 보는 듯하다.
등장인물은 시종일관 3인으로 압축돼 있다. 때로 한 사람이 퇴장하면 다른 사람이 입장하는 식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 작품 ‘불나방’에 와서는 독백에 가까운 장문의 일장 연설로 마무리된다. 얼핏 낯설고 어려운 그의 글은 마치 달리는 자동차에서 내려 땅을 밟으며 천천히 산책하는 느낌을 준다. 오랜만에 성실한 독서를 요구하는 소설을 만났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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