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5년 경극 ‘해서파관’評 언론게재

  • 입력 2004년 11월 9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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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스산했던 1965년 중국 상하이의 늦가을 어느 날.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내 장칭(江靑)은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과 함께 신문사 인쇄공장에 비밀리에 도착했다. 야오원위안이 꺼낸 원고는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함’. 이 글은 며칠 후인 11월 10일 일간지 ‘문회보’에 실린다. ‘문화대혁명(문혁)’의 봉화였다.

‘해서파관’은 ‘해서는 관직을 파면당하다’라는 뜻. 베이징시 부시장이자 역사 전문가 우한(吳g)은 명조 가정제(嘉靖帝·1507∼1566) 때 고관으로 황제가 정치에 태만하다고 직언해 파면 투옥된 해서를 주인공으로 경극 각본을 썼고 이 경극은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었다.

이를 본 장칭은 마오에게 ‘연극에 심각한 정치적 과오가 있다’고 보고했다. 가정제가 신하인 해서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에 빗대 마오가 몇 년 전 숙청한 펑더화이(彭德懷)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을 꼬집은 것 아니냐는 견강부회식 해석이었다. 마오와 그 추종자들은 좌파 지식인 야오원위안으로 하여금 ‘해서파관이 봉건시대 관리를 긍정적으로 그려 지주계급을 미화해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반대하고 있다’고 공격하도록 했다.

마오는 당시 정치적 위기상태였다. 자신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덩샤오핑(鄧小平) 류사오치(劉少奇)의 실용주의 정책에 몰려 국가주석 자리도 내준 채 유랑하고 있었다. 재기를 노리던 그에게 해서파관은 호재였다. 야오원위안의 글을 시작으로 반대파에 대한 포위망을 주도면밀하게 구축해간 마오는 마침내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하며 문혁 10년의 막을 올린다.

한때 위대한 군중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문혁은 20여년이 지나 권력 내부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결국 ‘마오가 정치적 소외를 발작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정치투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수록 정치에 유리하다며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홍위병)의 증오를 집단심리로 분출시키고, 나이든 사람들을 기득권 세력으로 몰며 타도 대상으로 삼은 마오의 전략은 후대에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좌파 원리주의를 넘어 실용주의로 선회한 중국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남의 역사지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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