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사람의 사상, 감정, 의사를 표현, 전달하거나 이해하는 음성적 부호라는 사전적 의미를 굳이 기술하지 않더라도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특히 말이라는 정치적 언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사상과 행동을 표현하는 정치지도자의 경우 말은 곧 지도자의 리더십의 원천이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는 정치적 언어로 인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때로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말의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은 비서실에 유능한 연설문 담당자를 두어 국가적 현안에 대한 연설이나 기자회견 때 주제에 대해 사전에 충분한 토론과 검토를 거쳐서야 비로소 자신의 입으로 언급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곧 정부 정책의 기본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물론 국가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의 말도 일차적으로는 대통령 자신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항상 자신의 정치적 언어를 여과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인의 지위만은 아니다. 조지 오웰이 ‘언어를 독점하는 것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대통령의 언어의 독점에는 말이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상당한 제약 요소가 상존하게 마련이며 또한 이를 의식하며 발언하게 된다.
특히 중요한 외교문제에 있어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과 다소 다른 국민의 생각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대통령의 언어 사용에 제약 요소이기도 하지만 국가수반으로서의 책무이기도 하다. 오늘날과 같이 각국 최고지도자간에 정상외교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대통령이야말로 최고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 최고지도자와의 대화나 기자회견 시 외교적 용어의 사용에 있어 대통령 자신의 솔직한 생각의 표현이나 단정적인 용어의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노 대통령이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과거사를 임기 중에 거론하지 않겠다고 언급한 것은 비록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공동의 목표로 하는 고차원적인 외교 전략을 감안하더라도 바람직한 정치적 언어의 표현은 아니었다.
물론 양국간의 가슴 아픈 과거사를 들추는 것이 미래의 발전적 관계 형성에 부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일간에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많다. 일본 지도자들의 되풀이 되는 망언, 한국과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왜곡 등 갖가지 문제가 야기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일본 정부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상황이 된다면, 이는 대통령의 역사 인식의 부재임은 물론 국민감정을 너무도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일본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아 이런 문제가 돌출될 가능성이 많은데, 정부 스스로 족쇄를 채우면 앞으로 어떻게 거론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최근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 규명, 의문사 조사 등 연일 과거사 문제를 들추며 과거사 문제의 해결 없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나온 이번 대통령의 발언에 국민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국민을 헷갈리게 하는 대통령의 정치적 언어가 성공할지 또는 실패할지 지켜보자.
김영래 아주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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