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양섭/‘쌀 개방 협상’ 잃어버린 10년

  • 입력 2004년 5월 30일 18시 15분


전북 고창군 성내면은 인구가 2679명에 불과한 전형적인 농촌이다. 13일 조용하기만 한 이곳 농촌마을 30여곳의 마을회관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쌀 개방 찬반투표 때문이었다. 고창군 농민회에 따르면 미성년자와 부재자를 뺀 유권자 1609명 가운데 1445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 중 93%인 1348명이 쌀 개방에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은 모내기철이라 주춤해졌지만 성내면의 경우처럼 그동안 쌀 개방 찬반투표를 실시한 곳이 전국적으로 10여곳에 이른다. 일손이 덜 바쁜 7월에 다시 불을 붙이겠다는 게 농민단체들의 계획이다. 특히 9월에는 ‘100만 농민대회’를 통해 쌀 개방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 시기는 지난해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 농업시장 개방에 반대하며 목숨을 끊은 농민 이경해씨의 1주기 전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쌀 개방 문제로 올 9월은 어려운 달이 될 것 같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와의 일정상 늦어도 9월까지는 쌀 개방을 요구하는 9개국과 양자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 정부는 이달 초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 태국 호주에 각각 대표단을 보내 탐색전을 펼쳤다.

사실상 쌀 시장 개방을 유예받기로 한 10년이 올해로 끝나는 만큼 이번 쌀 협상에서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양보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정부도 올해 추곡수매가를 4% 내리겠다고 발표하는 등 쌀 시장 일부 개방에 대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농민들은 아직 개방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민들은 정부가 10년 동안 이렇다 할 농업개방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개방이 대세라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농민들은 2월 한국과 칠레간 자유무역협정(FTA) 국회통과 때도 “수출이 중요하다”는 논리에 밀려 희생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창군 농민회 이대종 사무국장(29)은 “선진국도 변형된 보조금을 주는 등 농업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시장경제 논리로만 접근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한번도 시위에 참가한 적이 없다는 경기 평택시의 농민 이상목씨(62)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쌀 개방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그나마 노인들만 남아 있는 농촌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농민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올해 쌀 협상은 우리의 뜻대로 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한 번 양보를 받은 뒤 이뤄지는 협상인 데다 쌀 수출국들이 집요하게 개방을 요구하고 있어 뭔가를 주지 않고서는 타결짓기 힘들다는 것이다.

쌀 개방 문제는 역대 정권마다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고 슬쩍 넘어갔던 예민한 사안이다. 그렇게 미적거리다 10년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뤄놓을 수 없는 문제가 돼버렸다. 이제 정부는 농민들에게 쌀 개방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번 FTA 통과 때처럼 막판에 여론몰이 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려다간 혼란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그럴 것 같아 걱정이다.

윤양섭 사회2부 차장 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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