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신지호/민족자주가 ‘脫美’는 아니다

  • 입력 2003년 11월 25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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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자주(自主)라는 말은 성스러운 의미로 다가간다. 가뜩이나 자존심 강한 민족이 이 나라에 휘둘리고 저 민족에게 시달렸으니 오죽하랴.

일반적으로 우리는 일제의 침략을 자주성 훼손의 출발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기원은 좀 더 뿌리가 깊다.

▼‘열린 자주’가 진정 강한 자주 ▼

조선왕조 500년을 우리는 독립국가의 역사로 이해하지만, 이웃 나라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외쳤던 마오쩌둥(毛澤東)조차 식민화 이전의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인식했다(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조선은 독립국’이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어쨌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 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민족자주의 실현은 우리의 오랜 숙제다. 지금 그 과녁이 미국을 향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일 “미국이 세고 강하지만 자존심이 상할 만큼 종속적이지는 않다”며 10년 안에 자주국방을 할 것이며 대미관계도 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에 덧붙여 “미국에 조금 속이 상하더라도 대승적 견지에서 손을 꽉 잡고 가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노 대통령의 정치적 수는 결코 낮지 않다.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일거에 장악한 것을 볼 때, 노 대통령은 “버림으로써 더 큰 것을 얻는다”는 고수의 도를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외교에서는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너무 속이 보인다. ‘자존심과 밸’ 운운하며 대미관계를 변화시켜 10년 뒤에 자주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 어디 국가원수가 공식 석상에서 할 발언인가? 미국은 한국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꽉 잡는 손을 어떻게 생각할까?

진정한 민족자주의 실현과 관련해서는 진중하게 고려해야 할 점들이 있다. 우선 뚜렷한 비전이다. 모든 자주가 선은 아니다. 북한과 같이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끔찍한 자주도 있다. 우리의 자주는 철저하게 ‘열린 자주’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강한 자주다. 개방하면 할수록 체제 유지가 힘들어지는 북한식 자주는 사상누각의 사이비 자주일 뿐이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지정학적 정향성이다. 우리의 분단은 ‘반도성(半島性)’의 상실을 의미한다. 거꾸로 통일은 ‘반도성’의 회복을 뜻한다. 지정학적 용어로 표현해 보면, 통일은 해양국가 남한과 대륙국가 북한이 반도국가로 하나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변화의 의미를 오해하면 안 된다. 지금 이 정권의 핵심부에 포진해 있는 자주파들은 이 나라를 탈미(脫美)시켜 대륙국가로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망조로 가는 길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확산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볼 때, 우리의 통일은 친(親)해양적 반도국가의 길이어야 한다.

▼ ‘자주실현’ 구체적 방법 제시해야 ▼

마지막으로 자주를 실현할 구체적 방법론을 정교하게 마련해야 한다. 관념 속의 자주와 현실에서의 자주 실현은 다르다. 햇볕론자들은 종종 자신의 정책을 서독의 동방정책에 비유한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동방정책은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튼튼히 하면서 새로운 동서독 관계라는 자율공간을 개척해 나갔다. 반면 햇볕론자들은 기존의 한미동맹을 ‘의심스러운 관계’로 전락시키면서 정상회담 이후 새롭게 형성된 남북관계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북핵 문제에 있어 한국의 영향력은 저하되고 있다. 불편해진 한미관계는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적 경향을 방치하고 있으며, 북한은 핵 문제를 남북대화의 의제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지금 세계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중국은 치밀한 계산 끝에 미국이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타려 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은 내리려고 한다. 한탄만 하고 있기에 이 나라가 처한 현실이 너무도 엄혹하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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