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오정국, '숟가락 입에 물고'

  • 입력 2003년 9월 16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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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나무들도 숟가락 모양으로 꽂혀 있다

그 아래

지상의 눈부신 밥상들 부서져 뒹굴고

물 젖은 휴지처럼 누워 있는 사람들

입 닦은 휴지처럼 버려진 얼굴들

무심코 발 내뻗다 벼랑으로 떨어진

물처럼

혼절한 얼굴들

수저통의 숟가락처럼 몸 포개고 있다

-시집 '내가 밀어낸 물결'(세계사)중에서 부분 인용

태풍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호주의 예보관들이었다. 그이들은 가장 싫어하는 정치가의 이름을 붙이곤 했단다. 그랬다면 차라리 마음 놓고 종주먹질을 해댈 수 있으련만 우리 식 이름이 붙은 태풍 ‘매미’는 그 무서운 파괴력에 비해 어이없는 이름이다.

‘매미’는 1000t짜리 항만 크레인을 엿가락처럼 휘게 하고, 해일을 일으켜 어장을 쑥대밭으로 흔들고 지나갔다. 또 가을걷이 앞둔 곡식들로 황금물결 쳐야 할 ‘지상의 눈부신 밥상’을 송두리째 부수었다.

인간과 문명의 힘을 비웃듯 자연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지만, 자연 재해도 언제나 당하는 사람들이 반복해 당한다. 문명도 문화도 목숨기둥에 피는 버섯 같은 것, 푸른 나무가 숟가락으로 보이는 저 허기의 환영(幻影)을 언덕 위의 보송보송한 사람들이 알까?

‘매미’를 겪고 쓴 시가 아닌데 눈앞에 사진을 보듯 생생하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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