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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8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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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조선시대에도 법의학 책이 있었다니!”
법의학 전공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의학계 원로인 문국진 교수에게서 조선시대에 법의학 책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첫 느낌은 그랬다. 약 10년 전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종열 교수가 소장한 ‘증수무원록대전’을 빌려 복사한 뒤에, 내처 ‘언해본’을 읽었다. 그리고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언해본’이 있을지라도 한자 실력이 모자라고, 당시의 말이나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수준에서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쉬웠지만 그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권리 가운데 사람의 목숨에 관한 권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조선시대뿐 아니라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산 이후로 죽음을 당하거나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었던 적이 있을까? 우리 조상들도 주검을 검사하며 죽음과 관련된 사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였으리라.
이번에 서울대 규장각의 김호 박사가 ‘신주무원록’을 현대어로 옮겼다. 원본인 ‘무원록’은 원나라 때 지은 것으로 대대로 중국에서 쓰였는데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들어왔다. 제도와 풍습과 말이 달라 중국의 책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기 어려웠던 것을 세종대왕이 최치운 등에게 주석을 달도록 하여 ‘신주무원록’을 목판본으로 편찬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내내 주검을 검사하는 일에 절차와 방법을 알려주는, 즉 검시(檢屍)의 교과서이자 지침서로 쓰였다. 일본에서도 신주단지처럼 모신 책이다. 또 나중에 영조 때 구택규 구윤명이 다시 주석을 단 ‘증수무원록대전’의 원본이 된다.
당시는 과학과 인체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던 시대였으므로, 현대 법의학에서 적용할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또 주검을 훼손하는 부검(剖檢)을 할 수 없는 제약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지금의 법의학자가 배워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상권에서는 주검을 검사하여 수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주검을 샅샅이 살피는 방법을 강조하였으며, 자살로 위장한 경우에 나타나는 자국을 구별하도록 자세하게 일렀다.
그리고 주검의 검사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법 집행에서 주의할 점 그리고 절차와 서식에 대하여 기준도 제시하였다. 그 근본 철학은 지금도 유효한 ‘정확성’과 ‘엄격함’이다.
하권의 구체적인 검시 방법에는 모두 42가지 사망원인이 열거되었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경우’나 ‘우마에 밟혀 죽은 경우’처럼 현대에는 거의 생기지 않는 사례도 있지만, 나머지는 아직도 흔히 일어나는 사망의 원인들이다.
또 ‘침구 등을 시술받은 후 즉시 사망한 경우’처럼 이른바 의료사고도 있고, ‘남자가 지나치게 성교하여 사망한 경우’도 포함되었다.
비록 현대의 검시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지라도, ‘신주무원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상들이 지닌 인권 의식과 검시에 대한 철학을 높이 기린다. 나아가 ‘증수무원록’의 번역 출간도 기대한다.
이윤성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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