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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7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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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조직 책임자 잇단 자살▼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그러하고, 4월 초등학교 서승목 교장의 자살이 그러하다. 한 60대 노인은 카드 빚을 진 아들을 비관해 자살했다. 최근 고교생인 아들이 성적을 비관해 목을 매자 아버지가 같은 방법으로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가장(家長)이 자기 식솔들과 함께 죽는 일이다. 카드 빚을 진 가장의 가족 동반 자살이 빈번해졌다. 심지어 ‘어머니’의 책임까지 포기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30대 주부가 남편의 카드 빚을 비관해 두 자녀를 먼저 죽이고 자신은 막내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의 자살은 우울증을 앓거나 성적 부진, 실연 등을 비관한 경우였다. 이처럼 자신의 직무를 안정되게 수행해 온 사람들의 자기 파괴적 행동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외환위기다, 불황이다 해도 절대 빈곤층은 많이 줄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보릿고개의 어려운 시기를 겪었어도 목숨을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쉽게 생을 포기하는 것일까.
전통사회의 가장은 권위적이었고 가족을 통솔할 막강한 권한도 부여받았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었고, 그만큼의 존경도 받았다. 이런 위계서열은 비단 가족뿐 아니라 학교, 회사, 정부 조직 등에도 적용되었다. 가정에서 제일 먼저 푸는 밥은 항상 아버지에게로 갔고,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가장을 위해 된장찌개는 부뚜막에서 조용히 끓고 있었다. 자식들은 아버지 앞에서 크게 웃지도 못했다. 이 관계는 한국 전체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면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하나의 규칙과 질서를 획득해 왔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몇 년 동안 취직이 안 되었던 한 선배는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마다 곤히 잠든 마누라와 자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이처럼 대접과 권한 뒤의 책임감이 그동안 한국을 지탱해 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성이 추구되고 상호존중이 강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권력 있는 존재들, 권위적인 존재들은 집중 성토되었다.
경제발전이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미묘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게임의 규칙’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점차 범죄로 지탄받게 되었다. 수십년 동안 부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온 남자들이 시키는 커피 심부름이 성차별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더니 아이는 잠자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가장의 무관심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과도기에서 집단의 책임자들은 실컷 일해 주고 욕먹는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책임자는 여러 면에서 힘든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조직하고 통솔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적인 에너지가 소모되며 실수는 고스란히 자신의 책임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돈, 권력, 명예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다 고도 성장기를 경쟁 중심으로 살아온 젊은 세대의 ‘빨리빨리’의 조급증은 더해진다. 어려움을 모르고 풍요롭게 자란 30, 40대의 가장들은 참을성이 없고 조급하다. 그들의 인스턴트식 사고는 자기 삶까지도 즉석에서 버리게 하는 것이다.
▼‘속죄양식 희생’ 이제 그만▼
권위가 상실되고 의무는 그대로 남아 있는 이 과도기가 지나가야 한다. 가족, 직장, 학교 등의 모든 제도와 인간관계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재정립되고 소통되고 있다. 이때 가장들 또한 권리와 책임 위주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들이 사회 변화의 속죄양으로 희생당하는 일이 더 이상 없도록 말이다.
최혜실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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