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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5월 23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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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합리성이 지나치면 생활이 각박해지고, 개인주의가 지나치면 공동체가 피폐해진다. ‘사회자본’은 그런 황량함을 경험한 서구 사회학자들이 발견한 놀라운 비방(秘方)이다. ‘기회주의로 가득 찬 시장’과 ‘권위로 숨막히는 위계’의 이분법을 풀어갈 제3의 대안으로 ‘신뢰와 호혜의 네트워크’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트러스트(Trust)’와 로버트 퍼트남의 ‘민주주의 제대로 꾸려가기(Making Democracy Work)’가 출판된 후 서구 사회과학계에서는 신뢰와 사회자본의 영험한 효능에 대한 찬탄이 끊이지 않는다. 사회자본이야말로 경제성장, 민주화, 시민사회의 성숙과 복지사회 건설 등 널려 있는 문제들을 풀어줄 만병통치약이 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출판은 시의적절하다. 이 시대 중요한 화두가 된 사회자본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떠들썩한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자본을 처음 도입하고 정교화한 부르디외, 콜만, 퍼트남의 원작들과 현대사회학에서의 쟁점들을 다룬 포르테스, 사회자본과 민주주의간의 관계를 다룬 뉴튼, 사회자본과 경제발전간의 관계를 다룬 울콕의 글 등을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우리말로 옮기고 친절한 소개의 글을 붙였다. 한눈에 개념의 기원과 연구의 쟁점들을 파악할 수 있는 독본의 모습이다.
그러나 약간이라도 주의력 있는 독자라면 우리 주위에는 사회자본과 동일한 현상을 형상화하는 데 전혀 다른 색깔의 개념들이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화와 의리라는 밝은 색깔도 있지만, ‘우리가 남이가’로 압축 표현되는 연고주의, 정실주의, 파벌, 세몰이 등의 어두운 색깔이 더 흔하다. 여기에 생각이 미친 독자라면 편역자들의 ‘수상한’ 의도 또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이론가들은 우리가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체화한 ‘연고주의’의 효용을 뒤늦게 발견하여 호들갑이다”라는.
하지만 위계적이고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연고주의’가 갖는 의미는, 수평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서구사회에서 ‘사회자본’이 갖는 함의와는 전혀 다르다. 황량함 속에서 찾아낸 따뜻한 공동체의 추억이 사회자본이라면, “정의를 세우려니 의리가 울고 의리를 지키자니 합리에 반하더라”는 한 법조인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연고주의는 미시적 인간관계의 문법이면서 동시에 거시적 균열과 갈등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위계적이고 집중성이 강한 권력과 결합할수록 뒤탈도 더 컸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을 해 본다. 서구학자들이 자기들의 ‘관계건조증’ 치료제로 ‘사회자본’이라는 돈 냄새 물씬 풍기는 연고(緣故 혹은 軟膏)를 만들어 팔고 있다면, 대척점에 서 있는 우리 문제, 즉 ‘연고과다형(緣故過多型) 습진’을 치료할 땀띠약은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분말이 아닐는지.
늘 그러하듯 이런 딴죽걸기가 온당한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의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교수·사회학 jyye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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